밤 11시, 드디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왔을 때의 쾌감

밤 11시, 드디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왔을 때의 쾌감

밤 11시의 마법

회사에서는 못 만든다. 저 디자인.

오늘도 회사에서 8시간 동안 피그마를 켰다. 아무것도 안 만들었다. 미팅 3개, 피드백 수정 7건, 슬랙 메시지 42개. 디자인한 시간은 실제로 1시간 반.

그러다 밤 11시가 되면 달라진다.

샤워하고 머리 말리다가 갑자기 오늘 못 풀었던 메인 화면 레이아웃이 떠올랐다. 맥북 켰다. 피그마 켰다. 시작했다.

지금은 아무도 메시지 안 보낸다. 개발자도 잔다. 기획자도 잔다. 대표님은 당연히 잔다. 나만 깨어있다.

이때가 제일 좋다.

회사의 8시간 vs 집의 2시간

회사에서 8시간 동안 만든 것: 배너 3개, 버튼 컬러 수정 5번, 아이콘 정렬.

집에서 2시간 동안 만든 것: 완전히 새로운 온보딩 플로우 3개 화면, 인터랙션 프로토타입까지.

왜 이러는 걸까.

회사에선 시작하면 누가 부른다. “최디자님 잠깐만요.” 집중하면 슬랙이 운다. “급한데요.” 몰입하려는 순간 회의 알람. “5분 후 회의실 A.”

집에선 아무도 안 부른다.

남자친구도 자기 방에서 코딩한다. 방해 안 한다. 우리 룰이다.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는 각자 몰입 시간.

이 시간에는 시도할 수 있다.

회사에선 못 하는 시도. 기획서에 없는 레이아웃. 요구사항 밖의 인터랙션. 대표님이 싫어할 만한 색상.

실패해도 된다. 아무도 안 본다. Cmd+Z 누르면 된다. 다시 하면 된다.

회사의 디자인은 타협의 결과물이다. 기획 + 개발 가능성 + 일정 + 대표님 취향. 이것들의 교집합.

밤의 디자인은 순수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창의성은 여유에서 나온다

오전 10시. 메인 화면 디자인하라는 지라 티켓.

“일단 레퍼런스부터 봐야지.” Pinterest 켰다. 30분 지나갔다. “어 이거 괜찮네.” 저장했다. 다시 30분.

기획자가 슬랙 보냈다. “저 확인 좀요.” 기획서 읽었다. 요구사항 10개. 우선순위 없음. 전부 중요.

“이거 화면에 다 넣으라고?” 물었다. “네 다 필요해요.” 답왔다.

답답하다. 여백이 없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밤 11시. 똑같은 화면.

레퍼런스 안 본다. 머릿속에 이미 있다. 낮에 본 것들이 숙성됐다.

“이렇게 하면 되겠다.” 바로 시작한다. 프레임 만들고, 컴포넌트 배치하고, 타이포 조정하고.

손이 생각보다 빠르다. 막힘이 없다.

30분 만에 첫 시안 완성. 회사에서 3시간 걸릴 일.

차이가 뭘까.

여유다. 정신적 여유. 시간적 여유. “누가 볼까” 하는 불안 없는 여유.

창의성은 압박 속에서 안 나온다. 이건 회사가 모르는 진실.

경계에서 흐르는 영감

일과 삶의 경계. 나는 여기서 산다.

회사는 일이다. 돈 받고 하는 일. 요구사항 채우는 일. 스펙 맞추는 일.

집은 삶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실험하는 일. 실패해도 되는 일.

그런데 묘하다. 이 둘이 섞일 때 제일 좋은 게 나온다.

회사에서 못 푼 문제를 집에서 푼다. 집에서 시도한 방식을 회사에서 쓴다. 경계에서 순환한다.

지난주에 회사에서 못 만든 대시보드가 있었다.

“데이터 너무 많아요. 어떻게 정리하죠?” 기획자한테 물었다. “그게 디자이너가 할 일 아닌가요?” 돌아왔다.

하… 짜증났다. 그날 퇴근했다.

밤에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카테고리를 접으면? 아니면 탭으로? 아니면 아예 단계별로?”

다음날 새벽 1시. 갑자기 일어나서 노션에 적었다. “위계를 3단계로 나눈다. 중요도 순서로 배치. 나머지는 모달로.”

그게 답이었다.

월요일 아침에 만들었다. 1시간 만에 완성. 기획자가 “오 이거 완전 좋은데요?” 했다.

밤에 풀렸던 거다. 일에서 벗어났을 때.

왜 밤인가

낮에는 남의 시선이 있다.

“이거 괜찮을까?” “대표님 싫어하실까?” “개발자가 어렵다고 할까?” “트렌디한가?” “촌스럽진 않나?”

이런 생각들이 손을 묶는다.

밤에는 나만 있다.

“나는 이게 좋다.” 이 기준만 있다. 순수해진다.

그리고 밤은 조용하다.

낮의 소음이 없다. 차 소리, 사람 소리, 알림 소리. 전부 사라진다.

머릿속도 조용해진다. 낮에 쌓인 잡음이 가라앉는다. “빨리빨리”, “급해요”, “내일까지”. 이런 단어들이 증발한다.

고요 속에서 선명해진다. 내가 진짜 만들고 싶었던 것.

이게 밤의 마법이다.

하지만 대가가 있다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2시간.

이 시간이 내 진짜 창작 시간이다. 여기서 포트폴리오 나온다. 여기서 사이드 프로젝트 나온다. 여기서 내 디자인 나온다.

그런데 다음날 출근은 9시 반이다.

잠은 6시간. 부족하다. 매일 부족하다.

“그냥 일찍 자면 되잖아.” 남자친구가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근데 안 된다.

밤 11시는 협상 불가능하다.

이 시간을 포기하면 나는 회사 일만 하는 사람이 된다. 누군가의 요구사항만 채우는 사람. 내 디자인 없는 디자이너.

그건 못 참는다.

그래서 매일 피곤하다. 매일 부족하다. 그래도 만족한다.

어제 밤에 만든 온보딩 화면을 아침에 다시 봤다. 좋았다. 회사에서 절대 못 만들 디자인.

“이거 사이드 프로젝트에 쓸래.” 저장했다. 언젠가 포트폴리오 될 거다.

이게 내 자산이다. 회사 업무는 회사 것. 밤의 작업은 내 것.

11시가 기다려진다

요즘은 퇴근길이 설렌다.

“오늘 밤에 뭐 만들지?” 생각한다.

어제 Pinterest에서 본 레이아웃을 내 방식으로 해석해볼까. 아니면 계속 미뤄뒀던 디자인 시스템을 정리할까. 아니면 그냥 새로운 앱 아이디어를 스케치해볼까.

가능성이 열려있다. 제약이 없다.

회사 일은 정해져 있다. 오늘 할 일, 이번 주 할 일, 이번 분기 할 일. 로드맵에 다 박혀있다.

밤의 작업은 자유다. 하고 싶은 거 하면 된다. 누가 뭐래도 상관없다.

이 차이가 크다.

“디자이너로 살고 있나,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나.” 요즘 드는 생각.

회사에서는 디자이너다. 직책. 역할. 연봉 5500받는 사람.

밤 11시에는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순수하게. 좋아서 하는 사람.

후자가 되고 싶어서 이 일 시작했다. 전자만 하다 보면 잊어버린다.

그래서 밤 11시가 필요하다.

지속 가능한가

솔직히 모르겠다.

6년째 이렇게 산다. 회사 일 8시간, 내 일 2시간. 매일 반복.

지치긴 한다. 30살 되니까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 새벽 1시에 자면 다음날 오전이 죽는다.

“이러다 번아웃 온다.” 친구가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안 하면 더 번아웃 올 것 같다.

내 디자인 안 하면 회사 일이 전부가 된다. “빨간색 더 빨갛게”, “여기 2픽셀 내려주세요”. 이것만 하다가 끝난다.

그건 더 무섭다.

차라리 피곤한 게 낫다. 피곤해도 만족스럽다. 어제 만든 거 보면 뿌듯하다.

“내가 디자이너구나.” 확인된다.

언젠가는 바뀔까. 회사 일이 내 일이 되는 날. 9 to 6 안에서 창의적일 수 있는 날.

그런 회사가 있을까. 있다면 가고 싶다.

근데 지금은 없다. 그래서 밤을 쓴다.

오늘도 11시

지금 11시 23분이다.

샤워했다. 머리 말렸다. 맥북 켰다. 피그마 켰다.

오늘은 회사에서 못 끝낸 아이콘 세트를 정리하려고 했다. 근데 방금 더 재밌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새로운 프로필 편집 화면을 만들면 어떨까.”

회사 프로젝트랑 관계없다. 그냥 하고 싶다.

요즘 쓰는 앱들 프로필 화면이 다 비슷하다. 재미없다. 내 방식으로 하면 어떨까.

시작했다.

새 프레임. 320x700. 상단에 프로필 이미지. 아니다. 너무 뻔하다. 지웠다.

다시. 풀스크린 배경. 그라데이션. 그 위에 반투명 카드. 여기에 정보.

오. 괜찮다.

계속한다. 편집 버튼은 플로팅으로. 우하단. 아이콘은 펜슬. 색상은… #FF6B6B. 좀 강하다. #FF8E8E. 이게 낫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게 디자인이다. 내가 좋아하는 거.


밤 11시는 내 시간이다. 회사 것 아니고 누구 것도 아니고. 여기서 나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그냥 디자인하는 사람이 된다. 그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