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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

오후 3시, 예정 없던 긴급 미팅이 잡혔을 때

오후 3시, 예정 없던 긴급 미팅이 잡혔을 때

오전 10시 30분 출근했다. 슬랙 확인. 지라 티켓 14개. 한숨. 오늘은 집중할 수 있는 날이다. 미팅이 하나도 없다. 캘린더를 세 번 확인했다. 비어있다. 완벽하다. 어제부터 시작한 신규 기능 UI. 버튼 배치, 컬러 톤, 타이포그래피 위계. 머릿속에 다 그려져 있다. 오늘 안에 끝낼 수 있다. 피그마를 켰다. 파일을 열었다. 손이 가벼웠다. 컴포넌트 정리부터. 버튼 사이즈 8px씩 증가. 16, 24, 32, 40. 리듬이 있어야 한다. 패딩은 좌우 16, 상하 12. 아니다. 상하도 16으로 맞추자. 정사각형에 가까운 게 안정적이다. 프라이머리 컬러. #4A90E2. 너무 흔하다. 채도를 10 올렸다. #4A9AFF. 좀 낫다. 명도는 그대로. 접근성 확인. WCAG AA 통과. 좋다.타이포그래피. 헤드라인은 Pretendard Bold 24px. 본문은 Regular 16px. 행간은 1.6. 자간은 -0.02em. 숨쉬는 느낌. 30분이 지났다. 몰입이다. 이때가 제일 좋다. 오후 2시 47분 슬랙 알림. "@최디자 3시에 긴급 미팅 잡았습니다. 대표님이 봐야 한다고 하셔서요." 손이 멈췄다. 캘린더를 봤다. 13분 전에 추가된 이벤트. "신규 기능 방향 논의 (긴급)". 참석자 7명. 한숨이 나왔다. 지금 정리하던 컴포넌트. 레이아웃 그리드. 타이포그래피 스케일. 머릿속에 있던 맥락. 다 날아갈 예정이다. 저장했다. 파일명 끝에 "_진행중_0247" 붙였다. 나중에 돌아왔을 때 어디까지 했는지 알아야 한다. 물 한 잔 마셨다. 화장실 다녀왔다. 10분 남았다. 노션 페이지 열었다. 오늘 했던 작업 정리. 버튼 컴포넌트 4가지 사이즈 정리 프라이머리 컬러 조정 (#4A9AFF) 타이포그래피 스케일 1차 완료 다음: 카드 컴포넌트, 인풋 필드메모 안 해두면 까먹는다. 미팅 끝나고 돌아왔을 때 "내가 뭐 하고 있었지?" 이게 제일 답답하다.오후 3시 2분 회의실 입장했다. 7명 중 4명 도착. 노트북 열었다. 피그마 켜뒀다. 뭘 보여달라고 할지 모른다. 대표님이 들어왔다. 기획자 민수가 화면 공유 시작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간 기능인데요. 대표님이 어제 경쟁사 앱 보시고 우리도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화면에 뜬 건 경쟁사 앱 캡처본. 3개. 다 다른 스타일. "이 느낌으로 가면 좋겠어요. 근데 우리만의 색깔도 있어야 하고." 우리만의 색깔. 이 단어 나오면 회의 30분 추가다. 대표님이 말했다. "디자인적으로 어때요? 최디자님." 준비 안 된 질문이다. 3분 전에 처음 본 화면이다. "일단... 세 개가 다 다른 방향인데, 저희가 가져갈 건 어떤 쪽일까요?" "다 섞어서요. A는 레이아웃이 좋고, B는 컬러가 괜찮고, C는 애니메이션이 마음에 들어서." 다 섞기. 불가능하다. 안 어울린다. 입 밖으로 나온 말. "넵. 한번 작업해보겠습니다." 오후 3시 51분 회의 끝났다. 49분 걸렸다. 결론: 세 가지 스타일 섞은 목업 3개 내일까지. 내일까지. 오늘 하던 작업은 언제 끝내지. 자리 돌아왔다. 노션 메모 봤다. "다음: 카드 컴포넌트, 인풋 필드" 기억이 안 난다. 50분 전 나는 뭘 생각하고 있었나. 피그마 파일 열었다. "_진행중_0247". 버튼이 놓여있다. 4가지 사이즈. 그렇지. 이거 하고 있었다. 근데 왜 하고 있었지. 다음 스텝이 뭐였지. 노션 다시 봤다. "카드 컴포넌트". 아. 버튼 끝나고 카드 할 예정이었다. 버튼은 끝난 건가. 아니다. 호버 상태 아직이다. 디스에이블 상태도. 마우스 올렸다. 손이 안 움직인다.오후 4시 20분 다시 시작했다. 버튼 호버 상태. 배경 어둡게. 10% 더 어둡게. 아니다. 5%. 자연스러워야 한다. 트랜지션 0.2초. 부드럽게. 10분 걸렸다. 오전 같았으면 3분이다. 머리가 회의실에 있다. 경쟁사 A, B, C. 섞어야 한다는 것. 내일까지. 집중이 안 된다. 슬랙 알림. 개발자 준호. "디자님 저번에 주신 버튼 패딩이요. 16px 맞죠?" "네. 상하좌우 다 16이요." "근데 이전 버튼은 좌우 12였는데, 바뀐 건가요?" "아... 오늘 수정한 거예요. 컴포넌트 통일하려고요." "아 그럼 이미 개발 들어간 부분도 다 수정해야 하나요?" 멈췄다. 이미 개발 들어갔다. 모르고 수정했다. "...제가 확인하고 다시 드릴게요." 창 닫았다. 한숨. 오전에 수정한 버튼. 개발 확인 안 하고 했다. 이제 되돌려야 하나. 아니면 개발자한테 수정 부탁해야 하나. 머리 아프다. 오후 5시 15분 컨텍스트 스위칭. 대학 때 배운 용어다. 컴퓨터가 여러 프로세스 동시에 처리할 때. 프로세스 전환하면서 생기는 오버헤드. 사람도 똑같다. 오전에 하던 작업. 머릿속 맥락. 다음에 뭐 할지, 왜 이렇게 만들고 있는지, 어떤 문제를 풀고 있는지. 다 있었다. 미팅 하나로 날아갔다. 돌아와서 복구하는 시간. 30분. 1시간. 그 시간도 생산성이다. 미팅 49분 + 복구 30분 = 79분. 1시간 19분 손해. 오늘 미팅 하나. 어제는 세 개였다. 평균 두 개씩이면 하루 2시간 반. 일주일이면 12시간 반. 한 달이면 50시간. 50시간이면 프로젝트 하나 끝낸다. 계산하니까 더 우울하다. 오후 6시 30분 오늘 한 일 정리. 완료:버튼 컴포넌트 4가지 사이즈 프라이머리 컬러 조정 타이포그래피 스케일 1차미완료:카드 컴포넌트 인풋 필드 호버/디스에이블 상태들추가된 일:경쟁사 벤치마킹 목업 3종 (내일까지) 개발 들어간 버튼 패딩 이슈 해결오전에 생각했던 "오늘 안에 끝낼 수 있다." 틀렸다. 50% 달성. 그나마도 급한 일 생겨서 내일 아침부터 다른 거 해야 한다. 남자친구한테 톡 왔다. "오늘 저녁 약속 7시 맞지?" 잊고 있었다. 완전히. "미안 오늘 야근해야 할 것 같아. 내일은 어때?" "또? 이번주만 벌써 두 번젠데." 할 말이 없다. 오후 7시 45분 경쟁사 앱 3개 열어놨다. 캡처 떴다. 노션에 정리 중. A 스타일: 미니멀, 여백 많음, 폰트 크고 굵음 B 스타일: 컬러풀, 그래디언트, 둥근 모서리 C 스타일: 애니메이션 많음, 인터랙션 풍부, 재미 요소 이걸 섞는다. 미니멀한데 컬러풀하고. 여백 많은데 애니메이션 풍부하고. 모순이다. 하지만 해야 한다. 내일까지. 새 피그마 파일. "긴급_경쟁사벤치_1204". 아트보드 3개. 시안 A: 미니멀 베이스 + 컬러 포인트 시안 B: 컬러풀 베이스 + 여백 확보 시안 C: 절충안 손이 움직인다. 오전만큼 빠르진 않다. 그래도 움직인다. 이게 디자이너다. 갑자기 바뀌는 우선순위. 예상 못한 요구사항. 컨텍스트 잃고 복구하고. 반복. 오후 9시 20분 시안 1개 완성. 2개 남았다. 배고프다. 편의점 갔다. 삼각김밥 2개, 바나나우유. 돌아오는 길에 개발팀 석준이랑 마주쳤다. 야근 중. "디자님도 야근이네요." "응. 내일까지 급한 거 있어서." "저도요. 배포 일정이 당겨져서." 웃었다. 쓴웃음. 우리 둘 다 오전엔 없던 일 하고 있다. 오후 11시 10분 시안 3개 완성. 노션에 업로드. 코멘트 달았다. "시안 A: 미니멀 중심, 컬러는 포인트로만 활용 시안 B: 컬러 적극 활용, 여백으로 밸런스 시안 C: 두 방향의 절충, 가장 무난함 개인 의견: C가 실현 가능성 높아 보입니다." 개인 의견 안 쓰면 "디자이너 생각은?" 이라고 물어본다. 미리 쓴다. 슬랙에 공유. "@대표님 @민수 내일 아침 확인 부탁드립니다." 파일 닫았다. 피그마 끄지 않았다. 내일 아침 수정 요청 올 거다. 오전 1시 30분 집 도착. 씻었다. 침대 누웠다. 핸드폰 봤다. 남자친구 톡. "고생했어. 내일은 일찍 끝나면 좋겠다." 미안하다. 말은 안 했다. 눈 감았다. 머릿속에 버튼이 보인다. 16px 패딩. #4A9AFF. 호버 상태. 경쟁사 시안 A, B, C. 내일 아침 슬랙. 수정 요청. 미팅 또 잡힐 것. 오전 작업 또 멈출 것. 이게 일상이다. 컨텍스트 스위칭. 복구. 반복. 적응한 건지 체념한 건지 모르겠다.오후 3시 미팅. 결국 10시간 일한다. 오전 2시간은 사라졌다. 내일도 똑같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