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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으로
- 11 Dec, 2025
감각적으로 해주세요, 이 한 문장으로 시작된 전쟁
오전 10시 27분, 슬랙 알림 "최디자님, 어제 보내주신 랜딩페이지 시안 봤어요. 전체적으로 좋은데, 좀 더 감각적으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키보드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감각적으로. 이 세 글자가 오늘도 왔다.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답장했다. "넵, 어떤 방향으로요?" 물어봐야 한다. 안 물어보면 3번 수정한다. "음... 그냥 좀 더 세련되고 감각적인 느낌이요. 아시잖아요 ㅎㅎ" 모른다. 진짜 모른다.감각이라는 블랙홀 6년 동안 받은 피드백을 정리해봤다. 취미는 아니고 생존 본능이다."감각적으로" 27번 "세련되게" 19번 "고급스럽게" 15번 "트렌디하게" 12번 "힙하게" 8번합계 81번. 이걸 언어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시도해봤다. "감각적으로"를 해석하는 5단계: 1단계: 일단 받아적는다. "네 알겠습니다." 2단계: 레퍼런스를 요청한다. "어떤 느낌이신가요?" 3단계: 구체적 질문을 던진다. "컬러 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4단계: 3개 방향을 제시한다. A, B, C 중 고르세요. 5단계: 선택받은 방향으로 간다. 그리고 다시 "감각적으로" 듣는다. 무한루프다. 개발자 승우가 옆에서 웃었다. "또야?" "응. 감각적으로래." "그거 우리한테는 '알아서 잘 해주세요'거든." 맞다. 디자이너한테는 "당신 감각 믿어요, 근데 제 마음에 안 들면 다시요"다.번역 작업의 시작 감각을 언어로 바꾸는 건 번역이다. 한국어를 디자인으로, 디자인을 시각으로, 시각을 감정으로. 그리고 그걸 다시 Figma 레이어로. 오늘 전략은 이랬다. 1차: 레퍼런스 수집 "혹시 레퍼런스 있으세요?" 10분 뒤 답장. "음 딱히 없는데, 그냥 요즘 트렌드 있잖아요." 트렌드. 좋아. Pinterest 켰다. "modern landing page 2024" 검색. 100개 봤다.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Sans-serif 볼드체 여백 많이 그라데이션 살짝 3D 오브젝트 포인트 다크모드 기반이걸 "감각적"이라고 부르는 구나. 2차: 구체화 시도 슬랙 다시 켰다. "감각적인 방향으로 3가지 제안드릴게요. A. 미니멀 + 타이포 강조 (애플 스타일) B. 그라데이션 + 글래스모피즘 (요즘 트렌드) C. 다크모드 + 네온 포인트 (테크 감성) 어떤 게 가까우세요?" 5분 뒤. "음 B랑 C 섞은 느낌?" 합격이다. 방향이 나왔다.전쟁의 본질 문제는 여기서 시작이다. "B랑 C 섞은 느낌"을 만들었다. 4시간 걸렸다. 다크 배경에 그라데이션 카드. 네온 블루 포인트. 글래스모피즘 버튼. 자신 있었다. 이번엔 한 번에 간다. 슬랙에 링크 올렸다. "확인 부탁드려요." 30분 뒤. "오 좋아요! 근데 좀 더 감각적으로 다듬어주실 수 있을까요?" 키보드를 덮었다. 잠깐 화장실 갔다. 거울 봤다. "진정해." 혼잣말. 돌아와서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아쉬우신가요?" "음 전체적인 느낌이요. 뭔가 조금 더?" 조금 더. 이게 답이다. "조금 더"는 디자이너가 채워야 할 빈칸이다. 감각의 번역법 6년 하면서 배운 거. 감각은 숫자가 아니다. 감각은:8px을 12px로 바꾸는 게 아니다 #000000을 #1A1A1A로 바꾸는 게 아니다 폰트 사이즈를 2pt 키우는 게 아니다감각은 공기다. 요소와 요소 사이, 색과 색 사이, 글자와 여백 사이. 그 사이를 채우는 호흡. 구체적으로 하면 이렇다. 공간감 조정섹션 간 여백: 120px → 160px 숨 쉴 공간 만들기컬러 온도차가운 블루: #0066FF → 따뜻한 블루: #0052FF 1도 차이가 느낌을 바꾼다타이포 리듬제목: 48px/1.2 본문: 16px/1.6 행간이 리듬이다디테일 레이어버튼에 미세한 그림자: 0 2px 8px rgba(0,0,0,0.08) 안 보여도 느껴진다3시간 더 걸렸다. 수치상으론 미세하다. 8px 차이, 색상 코드 한 자리 차이. 근데 화면은 완전히 달라졌다. 오후 7시 13분, 승인 "오 이거다! 딱 이 느낌이에요!" 허탈하게 웃었다. 뭐가 달라졌는지 설명할 수 있을까. 못 한다. 나도 정확히 뭘 바꿨는지 설명 못 한다. 그냥 손이 움직였다. 6년 동안 쌓인 감각이 손을 움직인 거다. 이게 디자이너다. 말로 안 되는 걸 시각으로 만드는 사람. 추상을 구체로 바꾸는 번역가. "감각적으로"라는 주문을 받으면, 100개의 레퍼런스를 보고, 10개의 시안을 만들고, 3번을 수정하고, 1개를 완성한다. 그 과정에서:Pinterest 100장 Dribbble 50개 Figma 레이어 237개 커피 4잔 한숨 12번이게 쌓여서 "감각"이 된다. 밤 10시, 퇴근길 지하철에서 인스타그램 봤다. 광고가 뜬다. 어떤 쇼핑몰. 랜딩페이지가 별로다. 여백이 없다. 컬러가 시끄럽다. 타이포가 답답하다. 스크린샷 찍었다. 내일 팀원들한테 보여줄 거다. "이렇게 하지 말자"고. 직업병이다. 세상 모든 화면이 레이어로 보인다. 모든 디자인이 분석 대상이다. "감각적으로"라는 말이 어려운 이유. 감각은 학습이 아니라 축적이기 때문이다. 100개를 보고 나서야 101번째가 보인다. 책으로 배울 수 없다. 강의로 얻을 수 없다. 그냥 만들어야 한다. 매일. 수백 번.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아, 이 정도면 감각적이다"가 손끝에 온다.내일도 누군가 말할 거다. "감각적으로 해주세요." 그럼 또 번역하겠지. 81번째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