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From

개발자

개발자 남자친구랑 밥 먹으면서도 일 얘기를 하게 되는 이유

개발자 남자친구랑 밥 먹으면서도 일 얘기를 하게 되는 이유

저녁 7시, 홍대 파스타집민규가 포크를 돌리다가 말했다. "오늘 API 응답 시간이 3초 넘어가서 난리였어." 나는 파스타를 입에 넣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앱도 로딩 느리다고 리뷰 달렸어. 그거 때문에 오늘 회의했고." 둘 다 웃었다. 또 시작이다. 원래 안 그러려고 했다. 저녁 먹을 땐 일 얘기 안 하기로 했었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다짐했다. "우리 연애할 때는 개발자, 디자이너 없어. 그냥 최지우, 김민규야." 근데 안 된다. 같은 언어, 다른 세계민규는 백엔드 개발자다. 나는 UI/UX 디자이너다. 같은 프로덕트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근데 보는 세상이 다르다. "이 버튼 4dp만 더 올리면 안 돼?" "4픽셀? 그거 CSS 한 줄인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 중요하다. 나한테는. "이거 구현하는 데 3일 걸려." "3일? 버튼 하나인데?" 버튼 하나가 아니다. 민규한테는. 우리는 서로의 일을 70% 정도 이해한다. 나머지 30%는 평생 모를 것 같다. 그 30% 때문에 싸우기도 한다. 그 70% 때문에 계속 얘기한다. 공감의 형태 오늘 민규가 먼저 물어봤다. "너희 팀장이 또 피드백 바꿨어?" 바꿨다. 세 번. "빨간색이 너무 강렬하대. 어제는 임팩트 있게 하래서 채도 올렸는데." 민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팀장도 그래. 어제 코드리뷰에서 OK 했는데 오늘 다시 보더니 로직 바꾸래." 이게 좋다. 설명 안 해도 된다. '팀장'이라는 단어만으로 통한다. '일정'이라는 말만 해도 서로 한숨 쉰다. '갑자기'라는 말 뒤에 무슨 일이 올지 둘 다 안다. "피곤하지?" "응. 너도?" 이게 위로다. 오해의 지점근데 가끔은 안 통한다. "이 인터랙션 좀 봐봐. 버튼 누르면 이렇게 확장되면서 카드가 올라오는 거야." 민규가 내 피그마 화면을 봤다. "이거... 구현 가능은 한데..." 그 말투 안다. '가능은 한데' 뒤에는 항상 '근데'가 온다. "근데 애니메이션 duration이랑 easing 커브 맞추는 거 시간 걸려. 그리고 성능도..." "그냥 부드럽게만 되면 돼. CSS transition 몇 줄 아니야?" 민규가 웃었다. 짜증 섞인 웃음. "너도 그렇게 말하네. '그냥' 디자인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그냥'을 모른다. 내가 4시간 고민한 8dp. 민규가 하루 걸린 '간단한' API 연동. 겉에서 보면 다 '그냥'이다. 밥 먹으면서 일 얘기 하는 이유 저녁을 다 먹었다. 민규가 카드를 내밀었다. 번갈아 내기로 했는데 이번은 민규 차례다. "다음엔 일 얘기 좀 그만하자." 나도 그렇게 말했다. 근데 우리 둘 다 안다. 또 할 거다. 왜냐면. 회사 동료들한테는 할 수 없는 얘기를 민규한테 한다. "우리 팀장 진짜 모르는 것 같아. 디자인을." 회사에서는 못 한다. 민규한테는 한다. 민규도 나한테만 한다. "시니어 개발자가 코드 못 짠다는 걸 어떻게 말해." 회사에서는 못 한다. 나한테는 한다. 그리고. 민규는 내 고민을 이해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는 민규 고민을 이해한다. 70%는 이해한다. 이게 크다. "이 컴포넌트 시스템 봐봐. 한 달 걸렸어." "오. 변수 관리 이렇게 했구나. 깔끔한데?" 민규는 컴포넌트가 뭔지 안다. 나는 변수가 뭔지 안다. 친구들한테 보여주면. "응 예쁘다." 끝이다. 민규는 다르다. "이거 반응형은 어떻게 처리했어?" 물어본다. 우리가 만드는 것들 집에 가는 길에 민규가 말했다. "너희 회사 앱 업데이트했더라. UI 바뀐 거 네가 한 거지?" 했다. 3주 걸렸다. "좋던데. 특히 온보딩 플로우." 그 말 한마디에 3주가 보상받는다. 민규는 내가 무슨 고민을 했을지 안다. 저 화면 뒤에 몇 개의 시안이 있었는지. 몇 번의 회의가 있었는지. "고생했어." 이 말이 다르게 들린다. 나도 민규 회사 서비스를 쓴다. 로딩이 빨라졌다. 오류가 없어졌다. "API 개선한 거지? 체감돼." 민규가 웃는다. 우리는 서로가 만든 것들을 쓴다. 그리고 안다. 저 화면 뒤에 누군가의 야근이 있다는 걸. 내일도 또 할 거다 내일 저녁에도 약속이 있다. 이태원 멕시칸 레스토랑. 분명히 또 일 얘기를 할 것이다. "오늘 디자인 시스템 발표했어." "어땠어?" "오늘 배포했는데 버그 떴어." "심각해?" 이런 대화를 할 것이다. 안 하려고 해도 된다. 근데 하게 된다. 왜냐면 우리 인생의 8시간이 거기 있으니까. 하루의 절반이 그 일을 하니까. 그 고민이 진짜 고민이니까. 그리고 민규는 이해하니까.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70%는 이해하니까. 나머지 30%는. "나는 잘 모르겠는데 너가 힘들어하는 건 알겠어." 이렇게 말해주니까. 그거면 된다. 같은 배, 다른 노 우리는 같은 배를 탄다. IT라는 배. 스타트업이라는 배. 근데 다른 노를 젓는다. 민규는 코드로. 나는 픽셀로. 가끔 박자가 안 맞는다. "이거 왜 이렇게 디자인했어?" "이거 왜 이렇게 구현했어?" 싸우기도 한다. "개발자들은 몰라. 1픽셀이 얼마나 중요한지." "디자이너들은 몰라. 성능이 얼마나 중요한지." 근데 결국 같은 방향이다. 좋은 프로덕트. 사용자가 편한 서비스. 우리가 자랑스러운 결과물. 목적지는 같다. 그래서 밥 먹으면서도 얘기한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협업이 잘될까. "디자이너 관점에서는 이게 중요해." "개발자 입장에서는 이게 어려워." 서로 배운다. 민규는 내 덕분에 UI를 보는 눈이 생겼다. 나는 민규 덕분에 구현 가능성을 고민한다. 더 나은 사람들이 된다. 조금씩. 직장인 커플의 데이트 친구가 물어봤다. "남자친구랑 만나면 뭐 해?" 밥 먹는다. 영화 본다. 산책한다. 그리고 일 얘기한다. "그게 재밌어?" 재밌다는 아니고. 필요하다. 하루를 공유하는 거다. "오늘 이런 일이 있었어." "나도 비슷한 거 겪었어." 연애의 형태는 다양하다. 누구는 일과 연애를 완전히 분리한다. 퇴근하면 직장인 탈출. 주말엔 회사 얘기 금지. 우리는 섞는다. 민규의 일은 내 관심사다. 내 일은 민규의 관심사다. "오늘 코드리뷰 어땠어?" "오늘 디자인 피드백 어땠어?" 이게 우리의 안부다. 같이 성장하는 법 작년에 민규가 이직을 고민했다. 연봉 천만원 올려준다는 회사가 있었다. "근데 SI야. 고민돼." 나는 SI가 뭔지 안다. 서비스 개발자한테 SI가 뭔지 안다. "네가 하고 싶은 개발 할 수 있어?" "글쎄. 레거시 유지보수가 많을 것 같아." "그럼 돈이 문제야, 커리어가 문제야?" 민규는 한참 생각했다. 결국 안 갔다. 내가 도와줬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결정을 같이 고민했다. 나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에이전시에서 인하우스로 갈지. 민규가 물어봤다. "네가 하고 싶은 디자인이 뭔데?"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 한 프로젝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럼 답 나온 거 아냐?" 그래서 스타트업에 왔다. 우리는 서로의 커리어 코치다. 전문가는 아니어도. 옆에서 보는 사람이다. "네 강점은 이거야." "너 이거 잘하잖아." 객관적으로 봐준다. 밤 11시, 각자의 방 영상통화 중이다. 각자의 집에서. 민규는 사이드 프로젝트 코딩 중. 나는 포트폴리오 업데이트 중. 말은 별로 안 한다. 그냥 켜놓는다. "나 컴포넌트 네이밍 고민되는데." "뭔데?" "버튼 사이즈를 sm, md, lg로 할지 아니면 숫자로 할지." 민규가 생각하다가 말한다. "시맨틱하게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나중에 사이즈 추가되면 숫자는 헷갈려." 맞는 말이다. "너 그 API 에러 해결했어?" "아직. 로그 찍어보는 중." 이게 우리의 밤이다. 같이 있지는 않아도. 같은 시간을 보낸다. 일하면서 연애하는 게 아니라. 연애하면서 일한다. 미묘하게 다르다. 이해받는다는 것 어제 대표님이 말했다. "이 디자인 감각적으로 좀 더 세련되게 해주세요." 감각적으로. 세련되게. 뭔지 모르겠다. 민규한테 털어놨다. "감각이 뭔데. 내가 감각 선택권자야?" 민규가 웃었다. "우리 대표도 그래. '직관적으로 만들어주세요' 그래. 직관이 뭔데." 둘이 한참 욕했다. "감각적인 디자인 = 대표 취향" "직관적인 기능 = 대표가 이해하는 거" 정리했다. 이게 위로다. 혼자였으면 되게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내가 못하는 건가?' '내 감각이 이상한 건가?' 근데 민규도 비슷한 얘기를 듣는다. 그럼 내 문제가 아니다. 그냥 스타트업이 그렇다. 혼자 싸우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하지 않는 것 일 얘기를 많이 한다. 근데 하지 않는 게 있다. 회사 기밀은 안 한다. "이번 분기 매출이..." 이런 얘기는 안 한다. 동료 험담도 최소화한다. "우리 팀 OO가..." 시작하면 민규가 끊는다. "그 사람 나도 모르는데 얘기해도 돼?" 맞는 말이다. 그리고 서로 조언 강요 안 한다. "이럴 땐 이렇게 해." 이런 거 안 한다. 그냥 듣는다. "힘들었겠다." "나도 그럴 것 같아." 해결책이 필요한 게 아니니까. 공감이 필요한 거니까. 가끔 민규가 물어본다. "조언 필요해? 아니면 그냥 들어주면 돼?" 이 질문이 좋다. 명확하다. 주말 오후, 카페 나는 사이드 프로젝트 와이어프레임 그린다. 민규는 알고리즘 문제 푼다. 같이 있지만 각자 논다. 가끔. "이거 좀 봐봐." "응." 서로의 화면을 본다. "오 괜찮은데?" "이 부분은 이렇게 하면 어때?" 다시 각자 한다. 이게 편하다. 누가 보면 심심한 연애다. 같이 있는데 대화도 별로 없다. 근데 우리는 안다. 이게 편하다는 걸. 서로의 집중을 존중한다. 서로의 시간을 존중한다. 같이 있어도 혼자 있는 것처럼. 혼자 있어도 같이 있는 것처럼. 이게 우리 방식이다. 일 얘기 하는 커플 친구들이 말한다. "너희 데이트 때도 일 얘기 해? 지루하지 않아?" 지루하지 않다. 왜냐면 우리한테 일은. 인생의 큰 부분이니까. 하루 8시간. 출퇴근 2시간. 고민하는 시간까지 하면 12시간. 이걸 빼고 연애하면. 하루에 몇 시간 남는데. 그리고. 민규의 고민을 나만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내 고민을 민규만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게 특별하다. "오늘 배포했어." 이 말이 얼마나 떨리는 일인지. "디자인 리뉴얼 끝났어." 이 말이 얼마나 안도되는 일인지. 서로 안다. 결국 우리가 만드는 것 우리는 각자 무언가를 만든다. 민규는 코드를 만든다. 나는 화면을 만든다. 근데 같이 만드는 것도 있다. 서로에 대한 이해. 서로의 일에 대한 존중. 같이 성장하는 관계. 민규는 나 때문에 UI를 더 신경 쓴다. "이 버튼 위치 디자이너가 고민했을 거야." 나는 민규 때문에 구현을 더 고려한다. "이 애니메이션 개발자가 힘들 수도 있겠다." 서로를 더 나은 실무자로 만든다. 그리고. 힘들 때 옆에 있다. "오늘 힘들었지?" "응." "고생했어." 이게 크다. 다음 주 화요일 민규 회사에서 앱을 런칭한다. 3개월 준비했다. 나는 그 과정을 다 봤다. 야근하던 날들. 버그 잡느라 주말 출근하던 날. 테스트 시나리오 짜느라 스트레스받던 날. 다 안다. 런칭하면 나는 제일 먼저 다운받을 것이다. 하나하나 써볼 것이다. 리뷰도 쓸 것이다. "잘 만들었어." 민규도 우리 서비스 업데이트 때마다 그랬다. 우리는 서로의 첫 유저다. 가장 관심 있는 유저다. 이게 일 얘기를 하는 이유다.밥 먹으면서 일 얘기. 우리의 방식이다.

개발자: '이거 구현 어려운데요' vs 디자이너: '근데 이게 꼭 필요한데...'

개발자: '이거 구현 어려운데요' vs 디자이너: '근데 이게 꼭 필요한데...'

오후 2시, 핸드오프 미팅 회의실에 들어갔다. 개발자 민준씨가 이미 앉아있다. "디자인 공유드립니다." 피그마 화면을 띄웠다. 30초 만에 나왔다. 그 말. "이거 구현 어려운데요." 아직 컴포넌트 설명도 안 했는데. 숨을 참았다. "어떤 부분이요?" "이 인터랙션이요. 스크롤하면서 헤더가 반투명해지면서 블러 들어가고, 동시에 높이도 줄어드는 거. 퍼포먼스 이슈 있어요." 3일 걸렸다. 이 인터랙션 하나에. 레퍼런스 10개 찾고, 프로토타입 5번 만들었다. 대표님 피드백도 3번 반영했다. "근데 이게 꼭 필요한데..." 내 목소리가 작아진다. 매번 그렇다.필요하다는 말의 무게 "왜 필요한데요?" 민준씨가 묻는다. 공격적이지 않다. 진짜 궁금한 거다. 이럴 때 당황한다. "사용자 경험이..." "구체적으로요?" 막힌다. '감각적이니까', '애플도 이렇게 하니까'는 이유가 안 된다. 개발자들한테는. "스크롤할 때 컨텍스트를 유지하면서도 콘텐츠 영역을 확보하려고요. 헤더가 줄어들면 사용자가 어디 있는지 알면서도 더 많은 정보를 볼 수 있잖아요." "그럼 그냥 숨기면 안 돼요? 더 간단한데." 아니지. 그건 아니야. "완전히 숨기면 네비게이션 잃어버려요. 다시 위로 가려고 할 때." "위로 스크롤하면 다시 나타나게 하면 되는데." "그것도 구현 어렵잖아요." 민준씨가 웃는다. "그것도 어렵긴 한데, 블러보단 낫죠."타협의 기술 "블러 빼면 되나요?" "투명도 애니메이션만 남기면 훨씬 가볍죠." 피그마로 돌아갔다. 블러를 뺐다. 30초 만에 끝났다. 3일 걸린 디테일이. "이 정도면?" "이건 할 만해요." 기분이 묘하다. 다 무너진 것 같으면서도, 뭔가 배운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디자이너님." "네." "이 그라데이션은요. 8개 스탑이 꼭 필요해요? 3개면 안 돼요?" 화면을 봤다. 미묘한 그라데이션이다. 레이어 블렌드 모드도 썼다. Overlay에 Multiply 겹쳤다. "육안으로 구분 안 되는데." 민준씨 말이 맞다. "차이 나는데요." "디자이너님 눈에만요." 할 말이 없다. 맞는 말이니까. "3개로 줄일게요." "색상 코드만 주시면 제가 리니어 그라데이션으로 처리할게요." 또 배운다. 리니어 그라데이션이 퍼포먼스에 좋다는 걸. 피그마에서는 몰랐던 거다.꼭 필요한가 회의가 끝났다. 원래 디자인의 60%쯤 남았다. 블러 없어지고, 그라데이션 단순해지고, 애니메이션 타이밍도 조정했다. 내 방으로 돌아왔다. 피그마를 켰다. '핸드오프_최종.fig'를 '핸드오프_최종_최종.fig'로 저장했다. 원본 파일을 열었다. 블러 있는 버전. 예쁘다. 확실히 예쁘다. 근데 민준씨 말대로, 사용자가 알까. 블러가 있고 없고를. 그라데이션이 8스탑이고 3스탑이고를. 모를 거다. 아마. 그럼 이건 뭐지. 내가 3일 동안 한 건. 자기만족? 아니다. 그건 아니야. 디테일이 쌓여야 전체가 좋아지는 거니까. 근데 구현 안 되면 의미 없는 거니까. 다음 날 아침 슬랙이 왔다. 민준씨: "어제 헤더 구현 완료했어요. 스테이징 서버 확인해보세요." 링크를 눌렀다. 개발 서버가 떴다. 스크롤을 내렸다. 헤더가 줄어든다. 투명해진다. 블러는 없다. 그라데이션도 단순하다. 근데.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생각보다 훨씬 좋다. 움직임이 부드럽다. 퍼포먼스 때문에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 피그마에서 볼 때는 몰랐던 거다. 실제 디바이스에서, 실제 콘텐츠에서, 실제로 스크롤하면서 보니까. 민준씨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좋은데요." "그죠? ㅎㅎ 블러 없어도 괜찮죠?" 괜찮다. 솔직히. "근데요." "네." "스크롤 속도 빠를 때 애니메이션이 좀 끊겨요." "아 그거요. 쓰로틀 걸어서 그래요. 성능 때문에." "디바운스는요?" "디바운스 쓰면 반응이 늦어져요." 또 배운다. 쓰로틀과 디바운스의 차이. "그럼 easing 커브를 조정하면 어떨까요? ease-out 말고 custom cubic-bezier로." "오. 그거 괜찮을 것 같은데. 값 알려주세요." 피그마로 갔다. 모션 섹션을 열었다. cubic-bezier(0.4, 0.0, 0.2, 1) "이거요." "오케이. 적용해볼게요." 3주 후, 배포 기능이 라이브됐다. 사용자 피드백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헤더 애니메이션 부드러워요." "스크롤 경험 좋아졌네요." 블러 얘기는 없다. 그라데이션 스탑 개수도. 당연하다. 애초에 모르니까. 근데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상하게. 민준씨가 slack에 남겼다. "디자이너님, 이번 협업 좋았어요. 다음에도 잘 부탁드려요." "저도요. 많이 배웠어요." 진심이다. 블러 없어도 된다는 걸. 8스탑이 3스탑 돼도 된다는 걸. 완벽한 디자인보다 실제로 작동하는 디자인이 낫다는 걸. 근데. 어제 밤 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프로덕트 리스트 페이지. 카드에 hover하면 이미지가 확대되면서 블러가 들어간다. 손이 멈췄다. 민준씨 목소리가 들린다. "이거 구현 어려운데요." 블러를 뺐다. 그냥 scale만 넣었다. 마우스를 올려봤다. 심심하다. 다시 블러를 넣었다. 값을 줄였다. 8px에서 4px로. duration도 줄였다. 400ms에서 250ms로. 테스트했다. 나쁘지 않다. 이 정도면 민준씨도 할 만하다고 할 거다. 아마. 저장했다. '리스트_v1_개발고려.fig' 파일명이 웃긴다. '개발고려'. 예전엔 없던 접미사다. 근데 이제는 자연스럽다. 결국 디자인과 개발 사이. 완벽과 현실 사이. 이상과 타협 사이. 어디선가 만난다. 매번 다른 지점에서. "이거 구현 어려운데요." "근데 이게 꼭 필요한데..." 이 대화는 계속된다. 앞으로도. 근데 이제는 안다. '꼭 필요한 것'의 정의가 계속 바뀐다는 걸. 타협이 포기가 아니라는 걸. 함께 만드는 게 혼자 만드는 것보다 낫다는 걸. 민준씨가 또 메시지를 보냈다. "디자이너님, 다음 주 새 기능 핸드오프 미팅 잡을까요?" "네. 근데 이번엔 제가 먼저 여쭤볼게요." "뭐요?" "구현 가능한지요." "오. 좋은데요. 그럼 초안 공유해주세요. 미리 볼게요." 피그마 링크를 보냈다. 댓글 권한도 줬다. 1시간 뒤, 댓글이 달렸다. "이 부분 구현 어려울 것 같은데,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요?" 대안 제시였다. 비판이 아니라. 클릭했다. 민준씨가 직접 수정한 버전이다. 나쁘지 않다.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좋은데요. 이걸로 갈게요." "ㅎㅎ 그럼 이번엔 쉽겠네요." 회의실이 아니라 피그마에서 만났다. 싸우기 전에 협력했다. 이게 맞다. 이게. 6개월 전과 지금 6개월 전에는 몰랐다. 개발자가 '어렵다'고 하면 내 디자인을 무시하는 줄 알았다.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고집부리는 걸로 보일까 봐 걱정했다. 핸드오프 미팅이 두려웠다. 내 디자인이 깎여나가는 시간이니까. 지금은 안다. '어렵다'는 '불가능하다'가 아니다. '같이 다른 방법 찾자'는 뜻이다. '필요하다'고 말해도 된다. 근거만 있으면. 핸드오프는 협상이 아니다. 협업이다. 민준씨도 변했다. 요즘은 먼저 물어본다. "이거 왜 이렇게 디자인하셨어요?" 궁금해서 묻는 거다. 트집 잡으려는 게 아니라. 나도 묻는다. "이거 구현하려면 뭐가 필요해요?" 알고 싶어서다. 이해하려고. 어제 점심 민준씨랑 같이 밥 먹었다. "요즘 디자인 공유하실 때 구현 난이도 표시해주시잖아요." "네. 도움 돼요?" "많이요. 우선순위 정하기 쉬워요." 빨강, 노랑, 초록으로 표시한다. 빨강: 구현 어려움, 대안 논의 필요 노랑: 구현 가능하나 시간 필요 초록: 쉬움 "근데요." "네?" "가끔 빨강인데 꼭 필요한 거 있잖아요." "그죠." "그거요. 말씀해주세요. 왜 필요한지만 설명해주시면, 방법을 찾아볼게요." 민준씨가 웃는다. "힘들어도요?" "힘든 건 괜찮아요. 의미 있으면." 의미. 그 단어가 좋다. "저도요. 쓸데없는 디테일은 이제 안 넣어요." "쓸데없는 거 없던데요?" "있었어요. 많이." 둘이 웃었다. 지금 이 순간 피그마를 켰다. 새 프로젝트. 빈 캔버스. 마우스가 멈췄다. 예전엔 이랬다. '일단 최고로 예쁘게. 나중에 조정하면 되지.' 지금은 다르다. '실제로 만들어질 디자인. 처음부터 현실적으로.' 근데 타협이 아니다. 더 나은 디자인이다. 구현될 수 있는 디자인. 사용자가 실제로 경험할 디자인. 개발자와 함께 만들어갈 디자인. 컴포넌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엔 블러를 넣지 않았다. 처음부터. 대신 색상 대비를 높였다. 타이포그래피에 집중했다. 슬랙이 울렸다. 민준씨: "다음 주 핸드오프 기대되네요." 나도 기대된다. "이거 구현 어려운데요." 그 말이 이제는 반갑다. 함께 풀어갈 문제니까. "근데 이게 꼭 필요한데..." 이 말도 이제는 자신 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니까.타협은 포기가 아니다. 함께 더 나은 답을 찾는 과정이다. 오늘도 핸드오프 미팅에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