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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이
- 03 Dec, 2025
대표님이 말씀하신 '애플처럼 해주세요'를 들었을 때의 심정
그 말이 나왔다 회의실에 들어갔다. 대표님, 기획자, 개발팀장, 나. "이번 리뉴얼인데요, 우리 앱을 좀 더... 애플처럼 만들어주세요." 숟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 손에서."네... 애플처럼요." 대답은 했다. 근데 머릿속은 벌써 난리다. 애플의 뭘 말하는 거지? 미니멀? 여백? 타이포? 애니메이션? 아니면 그냥 '깔끔한 거'? "그죠, 깔끔하고 세련되게요. 애플 보면 정말 심플하잖아요." 나왔다. '심플'. 디자이너가 제일 듣기 싫은 단어 3위 안에 드는 그 단어. 심플의 무게 회의 끝나고 자리 돌아왔다. 피그마 켰다. 심플. 깔끔. 애플처럼. 이 세 단어를 화면에 구현하려면 뭐가 필요한가.타이포 시스템: 웨이트 4단계, 사이즈 8단계, 라인하이트 조정 컬러 시스템: 메인 3색, 서브 5색, 그레이스케일 10단계, 각각 다크모드 대응 스페이싱: 4px 기준, 8px, 12px, 16px, 24px, 32px... 일관성 아이콘: 240개 전부 2px 스트로크로 통일 애니메이션: 이징 커브, 타이밍, 딜레이 다 계산애플은 이걸 100명이 1년 동안 만든다. 우리는 나 혼자 2주. 심플해 보이는 건 복잡함을 숨긴 결과다. 복잡함을 정리하는 시간은 안 숨겨진다. 벤치마킹과 모방의 차이 점심 먹으면서 생각했다. 애플을 레퍼런스 삼는 건 좋다. 당연히 좋다.정보 위계가 명확하다 여백 사용이 과감하다 인터랙션이 의미 있다 일관성이 미친 수준이다근데 '애플처럼'은 다르다. 애플의 결과물을 보고 '저렇게'를 원하는 거다. 과정은 관심 없다. 벤치마킹: "애플은 왜 이 버튼을 여기 배치했을까?" 모방: "이 버튼 저기 있으니까 우리도 저기 놔." 벤치마킹: "저 여백은 어떤 호흡을 만드나?" 모방: "여백 많이 넣으면 되겠네." 벤치마킹은 원리를 배운다. 모방은 껍데기를 따른다.우리는 애플이 아니다 오후 3시. 개발팀장한테 슬랙 왔다. "디자인 언제 나와요? 다음 주 스프린트 들어가는데." 한숨 쉬었다. 애플이 할 수 있는 것:버튼 하나에 10가지 버전 테스트 A/B 테스트 위한 인프라 전담 모션 디자이너 3명 유저 리서치에 한 달 "이거 아닌 것 같은데" 하면 갈아엎기우리가 할 수 있는 것:버튼 2가지 버전 만들어서 사내 투표 구글 애널리틱스 숫자 보면서 추측 모션은 개발자가 CSS로 유저 리서치는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보기 "이거 아닌 것 같은데" 하면 "일단 내보내고 수정해요"맥락이 다르다. 리소스가 다르다. 목표가 다르다. 애플은 아이폰을 판다. 우리는 SaaS 구독을 판다. 애플 유저는 프리미엄을 기대한다. 우리 유저는 가성비를 본다. 애플은 통제된 생태계다. 우리는 웹뷰 반응형이다. 4시에 다시 회의 "시안 나온 거 좀 보여주세요." 피그마 화면 공유했다. 대표님이 스크롤을 내렸다. 5초 침묵. "음... 좋긴 한데, 뭔가 좀 밋밋한 것 같지 않아요?" 왔다. 심플하게 하래서 심플하게 했더니 밋밋하다. "애플은 심플한데 임팩트가 있잖아요. 우리 거는 좀..." 참았다. 3초 참았다. "애플의 임팩트는 여백에서 나옵니다. 여백을 살리려면 정보량을 줄여야 하는데, 지금 이 화면에 들어가야 하는 정보가 23개예요. 애플은 3개 넣습니다." "아, 그래도 다 중요한 정보라서..." "그럼 임팩트는 어렵습니다." 5초 침묵. "일단 이대로 가고, 나중에 조정하죠." 회의 끝. 애플처럼의 진짜 의미 퇴근길 지하철. 생각해봤다. 대표님이 나쁜 건 아니다. '애플처럼'은 사실 이런 뜻이다: "우리 서비스가 고급스러워 보였으면 좋겠어요." "유저가 쓰기 편했으면 좋겠어요." "경쟁사보다 나아 보였으면 좋겠어요." 근데 그걸 말로 설명 못 하니까 '애플'이라는 단어로 압축한 거다. 문제는 애플이 너무 크다는 것. 애플은 디자인이 아니라 철학이다. 시스템이다. 문화다. "Think Different"를 외치는 회사가 만든 결과물을 "저거 따라해"로 접근하면 모순이다. 그래서 뭘 하나 집 와서 맥주 땄다. 현실은 이렇다:'애플처럼' 요청은 계속 들어온다 거기 담긴 기대는 정당하다 근데 조건은 안 맞다 그래도 해야 한다그럼 어떻게?번역한다 "애플처럼 = 정보 위계 명확 + 여백 활용 + 일관성"으로 풀어서 설명한다.우선순위를 정한다 전부 애플처럼 못 한다. 핵심 3개 화면만 집중한다.단계를 나눈다 1차: 구조 정리, 2차: 디테일 개선, 3차: 폴리싱. 한 번에 안 된다.레퍼런스를 구체화한다 "애플 앱스토어 상세페이지에서 '스크린샷 캐러셀' 인터랙션"처럼 콕 집어서 이야기한다.기대치를 조정한다 "애플 수준은 어렵지만, 이 정도 개선은 가능합니다" 대안을 제시한다.금요일 오후 일주일 지났다. 수정 7번 거쳤다. 최종 시안 발표했다. "오, 훨씬 나아졌네요. 깔끔하고 좋아요." 대표님이 웃었다. 애플처럼은 아니다. 근데 우리답긴 하다. 정보 위계는 잡혔다. 여백은 전보다 과감하다. 일관성도 생겼다. 완벽하진 않다. 그래도 2주 전보단 훨씬 낫다. 퇴근하면서 아이폰 홈 화면 봤다. 애플 앱들 보다가 우리 앱 눌렀다. 나쁘지 않다. 진짜로. '애플처럼'은 목표가 아니라 방향이다. 거기서 배운 걸 우리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게 내 일이다. 대표님은 계속 '애플처럼'이라고 말할 거다. 나는 계속 그걸 번역할 거다. 그게 디자이너다.내일 월요일이면 또 '구글처럼'이 나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