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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을 더 빨갛게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을 때

빨간색을 더 빨갛게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을 때

빨간색을 더 빨갛게 해달라는 요청출근했다. 슬랙을 열었다. 메시지가 4개. 첫 번째는 기획자: "홈 배너 컬러 한 번 봐주세요." 두 번째는 개발자: "이거 언제쯤 나와요?" 세 번째는 대표님: "피그마 확인해주세요." 네 번째는 마케팅: "빨간색을 좀 더 빨갛게 해주세요." 손가락이 움직였다. Figma를 켰다. 컬러 코드를 확인했다. #D63031. 이미 충분히 빨갛다. Red 채도는 최대다. 명도도 조정했다. 이게 더 빨갛게 된다는 건... 아, 알겠다. 이건 색상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안다. 추상적 피드백의 정체 회의실에 앉았다. 마케팅 이사가 말했다. "이 빨강이 좀 약한 것 같아요. 더 강렬해야 할 것 같은데..." "강렬한 느낌이면 채도를 올리거나 명도를 내려야 하는데, 지금 상태에서는 둘 다 최대예요. 어떤 느낌을 원하시는지..." "아, 그냥 좀 더 빨갛게요." 여기가 멘탈이 부서지는 지점이다. '빨갛게'는 색상이 아니다. 감정이다. 정확히는, 내가 당신의 감정을 코드로 번역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보통 이런 피드백은 이렇게 분류된다: 1. 실제로는 다른 걸 원하는 경우 "빨강이 약해 보여요" = 실제로 원하는 건 명도가 높은 다른 색상이거나, 배경색과의 대비를 원할 수도 있다. 때론 사이즈 문제일 수도. 2. 감정적 이상향을 색상으로 표현한 경우 "더 선명하게" "더 힘있게" "더 신뢰감 있게" 같은 요청들. 색상이 아니라 심리다. 3. 진짜로 컬러를 모르는 경우 "더 빨갛게 해줄 수 있어?"라고 묻는데 #FF0000에서 더 갈 데가 없을 때. 이건 답답함의 영역이다. 4. 나는 다른 걸 봤는데 당신이 잘못 만든 거 아니야? 같은 불신 가장 심각한 피드백. 내 디자인이 아니라 내 능력을 의심받는 느낌.내가 했던 대응은 보통 이렇다: 먼저 심호흡을 한다. 3초. 화면에 안 보이게. 그 다음 몇 가지를 확인한다. 첫째, 내가 정말 #FF0000을 썼는가. (안 썼다면 업그레이드.) 둘째, 그 색상이 배경이나 주변 요소와 어떻게 조화되는가. 셋째, 내 모니터 색감이 표준인가. (사실 대부분 그렇지 않다.) 그 다음에는 질문을 한다. 부드럽게. "더 강렬해야 한다는 건 화면에서 더 먼저 눈에 띄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폰에서 봤을 때 느낌이 다르게 보이나요?" 90% 확률로 이렇게 온다: "아, 모니터에서 봤을 때는 다르게 보이더라." 이제부터가 프로페셔널 대응이다. 추상적 피드백을 번역하기 사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피드백을 받는 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거다. 첫 번째 실수: 그걸 개인 공격으로 받는 것 "내 디자인이 못났다는 뜻인가" →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안 됐다는 뜻이다." 프로젝트 초반에 색상 시스템을 설명할 때, 나는 이제 이런 식으로 말한다: "메인 빨강은 #D63031로 잡겠습니다. 이건 모바일과 PC에서 일관성 있게 보이도록 맞춘 값이고, 배경이 밝으면 더 선명하게, 어두우면 부드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만약 더 극적인 느낌이 필요하면 #FF0000도 옵션으로 두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피드백이 달라진다. 대표님: "아, #FF0000 한번 봐봐." 끝. 3초 만에 답이 나온다. 두 번째 실수: 바로 수정하려고 하는 것 "빨강을 더 빨갛게" 들었을 때, 나는 더 이상 그냥 건너뛴다. "화면 공유해서 함께 봐도 괜찮을까요?" 대부분 동의한다. 그리고 공유하는 순간, 상대방도 본다. "아, 이건 빨강이 문제가 아니라 버튼 크기가..." "실제로 봤을 땐 더 밝아 보여야 할 것 같고..." "어? 이건 예상과 다른데..." 추상적 피드백은 구체적인 맥락이 없을 때만 추상적이다.멘탈 지키면서 일하기 솔직히 말하면, 6년을 해도 이런 피드백은 짜증난다. 다만, 짜증나는 방식이 바뀌었다. 1년차 때: 마음이 부서진다. "내가 디자인을 잘 못하는 건가?" 3년차 때: 상대를 무시한다. "색상을 모르는 거네." 6년차 때: 아, 이건 내 문제가 아니고 대화 문제다. 라고 생각한다. 이제 내가 하는 일은: 첫째, 피드백을 받을 때 추측하지 않기. "더 밝게"는 명도인가 채도인가 톤인가. 묻는다. 둘째, 나는 색상 전문가라는 걸 은연중에 드러내기. 디자인팀 회의 때 "색상은 명도, 채도, 톤 세 가지 차원이 있고..." 같은 교육을 슬쩍 끼워넣는다. 그럼 다음부턴 피드백이 조금 더 구체적이다. 셋째, 결정권자와 1대1로 확인하기. 회의실에서 여러 명이 있을 땐 피드백이 아니라 의견 중복이다. "혹시 따로 5분만 시간 내실래요?" 하면 대부분 오케이. 넷째, 대안을 항상 3개 준비하기. "더 빨갛게"라는 피드백 오면, 나는 벌써 3가지를 준비했다.채도 높은 빨강 (#FF0000) 명도 낮은 빨강 (#A00000) 따뜻한 톤의 빨강 (#E85D3F)"어떤 방향이 더 맞는 것 같으신데요?" 하면서 보여준다. 그럼 상대는 선택만 하면 된다. 다섯째, 일정과 피드백은 동시에 관리하지 않기. "마감이 오늘 오후인데 색상도 봐주세요"는 절대 금지. 일정이 있으면 피드백 기간을 길게 잡는다. 재검토할 시간이 있으면 피드백도 깊어진다. 그래도 힘들 때 지금 내 모니터 옆엔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있다. "The client doesn't know what they want. That's why they hired you."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때론 이 문장이 필요하다. "빨강을 더 빨갛게"는 피드백이 아니다. 그건 신호다. 신호가 뭔가? 대부분은 "난 만족 못 해"가 아니라 "난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다. 그리고 그 뭔가를 찾는 게 내 일이다. 색상 코드를 아는 것보다, 그 신호를 읽는 게 훨씬 중요하다.결국 디자인 문제가 아니라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가 같은 언어를 쓰는지의 문제다.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