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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디자이너인데, 왜 나도 모르는 결정을 혼자 해야 할까

리드디자이너인데, 왜 나도 모르는 결정을 혼자 해야 할까

리드인데 왜 나만 모르지 오늘 아침 슬랙 DM이 세 개 떴다. "최디자님, 이 버튼 색상 어떻게 할까요?" "최디자님, 이 플로우 이대로 진행해도 될까요?" "최디자님, 디자인 시스템 컬러 토큰 수정해도 돼요?" 나도 모르겠는데. 리드 된 지 8개월. 월급은 그대로인데 질문은 두 배로 늘었다. 웃긴 건, 다들 내가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나도 매일 고민하는데. 이게 맞나, 저게 맞나. 어제까지만 해도 이 방향이 맞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또 아닌 것 같고. 답장은 30분 뒤에 했다. "일단 A안으로 가보자. 테스트해보고 피드백 받으면 수정하면 돼." 확신 없는 문장. 근데 확신 있는 척 보내야 한다. 그게 리드니까.회의실에서 혼자 결정하는 시간 오후 3시. 기획자, 개발자, PM이 모였다. 새 기능 디자인 리뷰. "이 카드 레이아웃, 어떤 게 좋을까요?" 기획자는 A안. 개발자는 B안. PM은 "둘 다 괜찮은데요?" 시선이 나한테 온다. 결정을 기다린다. A안은 심미적으로 더 낫다. 여백이 좋고, 타이포그래피가 깔끔하다. 근데 개발 공수가 3일 더 걸린다. B안은 기존 컴포넌트 재활용이라 1일이면 된다. 근데 디자인적으로는 타협이다. "B안으로 가죠. 일정이 더 중요하니까." 내 입에서 나왔다. 기획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개발자가 좋아한다. 회의는 끝났다. 혼자 남았다. 피그마 파일 앞에서 B안을 다시 본다. 맞는 결정일까. 포트폴리오에 넣고 싶지 않은 디자인을 내가 골랐다. 리드니까. 일정을 지켜야 하니까. 팀을 생각해야 하니까. 근데 이게 맞나.정답 없는 질문들 리드가 되고 나서 깨달은 것. 정답이 있는 질문은 애초에 나한테 안 온다. "이 아이콘 사이즈 몇 px이 좋아요?" 같은 건 주니어가 스스로 정한다. 24px, 20px, 결정하고 진행한다. 디자인 시스템에 있으니까. 나한테 오는 건 이런 거다. "전체 UI 톤앤매너를 바꿔야 할까요? 지금 트렌드는 더 미니멀한데." "개발 리소스가 없어요. 디자인을 단순화할까요, 일정을 밀까요?" "대표님이 이 컬러가 별로래요. 설득할까요, 바꿀까요?" 정답이 없다. 아니, 정답이 여러 개다. 각자의 관점에서는 다 맞는 말이다. 근데 누군가는 정해야 한다. 그게 나다. 어제는 개발팀 리드한테 DM을 보냈다. "형, 이런 거 고민될 때 어떻게 해요?" 답장이 왔다. "그냥 정해. 틀려도 돼. 안 정하는 게 제일 나쁨." 맞는 말이다. 근데 쉽지 않다. 혼자 결정하고 혼자 책임지기 지난달에 메인 화면 리뉴얼을 결정했다. 사용자 피드백도 좋았고, 데이터도 긍정적이었다. 팀원들한테도 컨펌 받았다. "좋아요, 최디자님!" 다들 동의했다. 2주 뒤 A/B 테스트 결과. CVR이 1.2% 떨어졌다. 대표님이 물었다. "왜 떨어진 거죠?" 기획자가 말했다. "디자인이 바뀌어서 그런가요?" 개발자가 말했다. "원래 디자인이 더 나았나 봐요." 그 순간 알았다. 결정은 같이 했어도, 책임은 내가 지는 거구나. "제가 다시 분석해볼게요."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잠깐 멈췄다. 심호흡 세 번. 화장실 가서 물 마셨다. 거울을 봤다. 피곤해 보인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피그마를 켰다. 원래 버전을 다시 봤다. 리뉴얼 버전을 다시 봤다. 히트맵 데이터를 다시 봤다. 혼자 원인을 찾았다. 결국 찾았다. CTA 버튼의 위치가 문제였다. 스크롤 없이 보이는 영역에서 10px 벗어났다. 작은 차이. 근데 모바일에서는 큰 차이. 수정했다. 재배포했다. 1주일 뒤 CVR 회복. 아무도 칭찬 안 한다. 당연한 거니까.리드인데 누구한테 물어봐 제일 힘든 건 이거다. 내가 모를 때 물어볼 사람이 없다는 것. 주니어 때는 좋았다. 막히면 선배한테 물어봤다. "언니, 이거 어떻게 하면 좋아요?" 답을 받았다. 배웠다. 성장했다. 지금은 내가 선배다. 다들 나한테 물어본다. 근데 나도 모르겠을 때는? 외부 커뮤니티에 물어볼까. "저 리드인데요, 이런 상황에서..." 근데 너무 구체적이면 회사 일 유출이고, 너무 추상적이면 도움이 안 된다. 남자친구한테 물어볼까. 개발자니까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근데 회사가 달라서 맥락을 다 설명해야 한다. 설명하다 보면 "아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하게 된다. 동기한테 물어볼까. 대기업 다니는 친구. 근데 걔네는 시스템이 있다.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있다. 우리 회사랑 다르다. 결국 혼자 생각한다. 침대에 누워서. 샤워하면서. 출근길 지하철에서. 답을 찾는다. 아니, 답을 만든다. 그게 리드구나.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어제 디자이너 모임에 갔다. 친구 넷이서 만났다. 다들 경력 비슷하다. "요즘 어때?" 한 친구가 말했다. "나 다음 달에 시니어로 올라가. 근데 뭐가 달라지는지 모르겠어." 다른 친구가 말했다. "나는 아직 주니어 일만 해. 배울 게 많아." 내가 말했다. "나는... 매일 결정만 하는 것 같아. 근데 뭐가 맞는지 모르겠어." 다들 공감했다. "리드 힘들지?" "책임만 늘어나지?" "월급은 안 오르는데?" 맞다. 다들 안다. 근데 해결책은 없다. 집에 와서 생각했다. 왜 이렇게 힘들까. 왜 나만 이런 것 같을까. 검색했다. "리드 디자이너 힘든 점" "디자인 리더십 외로움" 영어로도 검색했다. "Lead designer loneliness" "Design leadership stress" 글들이 나왔다. 다 비슷한 얘기였다. 정답 없는 결정. 혼자 떠안는 책임. 물어볼 사람 없는 외로움.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다들 그렇다. 리드는 다 그렇다. 조금 위로가 됐다. 아주 조금. 그래도 정하는 사람 오늘 아침 또 슬랙이 왔다. "최디자님, 이 인터랙션 어떻게 할까요?" 커피를 마셨다. 피그마를 켰다. 파일을 봤다. 10분 생각했다. "이렇게 해보자. 프로토타입 만들어서 내일 리뷰하자." 확신은 70%다. 나머지 30%는 불안이다. 근데 보냈다. 안 정하는 것보다 낫다. 리드라는 게 이런 거구나. 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답을 정하는 사람. 틀릴 수 있어도 정하는 사람. 책임지는 사람. 월급이 안 오른 게 좀 억울하긴 하다. 리드 수당이라도 줬으면 좋겠다. 근데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이거다. 내가 정하지 않으면, 아무도 안 정한다. 프로젝트가 멈춘다. 팀이 헤맨다. 그래서 오늘도 정한다. 확신 없어도. 외로워도. 정답 모르겠어도. 피그마 파일 이름을 바꿨다. "Final_v8" → "Final_v9" 어차피 v10도 나올 거다. 완벽한 건 없으니까. 외로움의 무게 점심 먹고 돌아왔다. 팀원 둘이랑 같이 먹었다. 파스타 맛있었다. 대화 중에 한 명이 물었다. "언니는 고민 없어 보여요. 결정할 때 확신 있어 보이던데." 웃었다. "그럴 리가. 매일 고민해." "진짜요? 전혀 몰랐어요." 그렇게 보이는구나. 확신 있는 척이 통하는구나.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이게 리드의 일인가. 불안해도 불안한 척 안 하기. 모르겠어도 아는 척 하기. 아니, 아는 척이 아니라... 방향을 제시하기. 책상에 앉았다. 모니터를 켰다. 오늘 결정해야 할 게 세 개 더 있다. 하나씩 본다. 하나씩 판단한다. 하나씩 결정한다. 외롭다. 맞다. 근데 이게 내 일이다.정답은 모르겠지만, 오늘도 정해야 한다. 그게 리드니까.

대기업 동기가 연봉 올랐다는 SNS 게시물을 본 후

대기업 동기가 연봉 올랐다는 SNS 게시물을 본 후

인스타를 보지 말 걸 점심시간에 인스타를 열었다. 실수였다. 대학 동기 은지의 스토리가 떴다. "연봉 협상 끝! 올해도 화이팅💪" 뒤에 선명한 8천만원대 연봉 계약서 일부가 보였다. 물론 숫자는 가려놨지만, 작년에 7천이라고 했으니 계산이 됐다. 나는 5500만원이다. 작년이랑 똑같다. 은지랑 나는 같은 학교, 같은 과, 같은 해에 졸업했다. 둘 다 디자이너로 시작했다. 차이는 은지는 대기업 계열사로, 나는 스타트업으로 갔다는 것뿐이다. 6년 전 선택이었다. 국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생각났다. 8천. 5500. 2500만원 차이. 한 달이면 200만원 넘게 차이 난다. 내 월세 세 달 치다. "디자, 밥 안 먹어?" 팀원 수현이가 물었다. 나는 숟가락을 들고 있었지만 입으로 가져가질 않았다. "먹고 있어." 거짓말이었다.6년 전으로 돌아가면 2018년 겨울이었다. 은지랑 나는 스타벅스에서 만났다. 둘 다 여러 회사에서 오퍼를 받은 상태였다. "나는 S전자 계열사 갈 것 같아." 은지가 말했다. "연봉은 좀 낮은데, 안정적이잖아." 당시 은지 오퍼는 3800만원이었다. 내 스타트업 오퍼는 3500만원. "나는 스타트업 갈래." 내가 말했다.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대기업은 프로세스가 너무 많잖아." 진심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넌 능력 있으니까 금방 올라갈 거야." 은지가 웃었다. 6년이 지났다. 은지는 8천만원이 됐다. 나는 5500만원이다. 더 많이 배웠나? 글쎄. 대기업은 프로세스가 많다고 했는데, 스타트업은 프로세스가 아예 없다. 매번 즉흥이다. 디자인 시스템 만들자고 해도 일정에 밀려서 못 만든다. 개발자들은 바쁘고, 기획자들은 자꾸 바뀌고, 대표님은 애플처럼 하라고만 한다. 은지는 체계적인 디자인 시스템 안에서 일한다. 툴도 최신이고, 교육도 받고, 컨퍼런스도 회사 돈으로 간다. 나는 피그마 프로 요금도 내 돈이다. 오후에 디자인하면서도 계속 생각났다. 선택을 잘못한 건가.스타트업의 낭만 처음 입사했을 때는 달랐다. 대표님이 직접 나를 면접했다. "우리는 제품을 만들고 있어요. 단순히 디자인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거죠." 멋있었다. 정말로. 첫 달에는 서비스 전체를 다시 디자인했다. 개발자들이랑 밤새 의견 나누고, 프로토타입 만들고, 유저 테스트하고. 회사에서 자고 새벽 라면 먹고. 피곤했지만 재밌었다. "디자님 덕분에 완전 달라졌어요!" 개발팀장이 그렇게 말했을 때, 진짜 뿌듯했다. 2년 차 때는 리브랜딩을 주도했다. 로고부터 컬러 시스템까지 전부. 대행사도 안 쓰고 내가 다 했다. 포트폴리오에 넣을 만한 프로젝트였다. 3년 차 때 디자인 리드가 됐다. 연봉은 4500만원으로 올랐다. 1000만원 올랐다고 좋아했다. 그때까지는 좋았다. 4년 차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회사가 커지면서 투자를 받았다.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게 많아졌다. "성장"이라는 단어가 매일 들렸다. 디자인보다 속도가 중요해졌다. "일단 빨리 만들어주세요. 나중에 개선하죠." 나중은 안 왔다. 5년 차에 5500만원이 됐다. 500만원밖에 안 올랐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요." 대표님이 미안해했다. 6년 차인 지금도 5500만원이다. "올해는 투자 유치가 중요해서요." 낭만은 어디로 간 걸까.숫자로만 보면 계산을 해봤다. 6년간 내가 번 돈: 약 2억 7천만원 6년간 은지가 번 돈: 약 3억 5천만원 8천만원 차이다. 여기에 복리후생을 더하면 더 벌어진다. 은지는 4대 보험 회사가 다 내주고, 점심 식대 지원받고, 교통비 나오고, 연차도 자유롭게 쓴다. 우리는 점심 각자 사 먹는다. 구내식당 같은 건 없다. 연차는 자유롭게 쓴다고 하는데, 팀원이 3명뿐이라 눈치 보인다. 대기업은 스톡옵션도 있다던데, 우리도 있긴 하다. 근데 회사가 상장할 가능성은 솔직히 모르겠다. 은지는 강남에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전세 3억에 대출 1억 받아서. "회사 다니면서 모았어." 나는 마포 원룸에 월세로 산다. 65만원. 6년째 월세다. 전세 대출받으려고 해도 연봉이 낮아서 한도가 적다. "그래도 네가 더 자유롭잖아." 남자친구가 그렇게 말했다. 걔도 개발자인데, 스타트업 다닌다. 연봉은 나보다 좀 높다. 6800만원. "자유로워서 뭐해. 돈이 없는데." 쏘아붙였다. 나도 놀랐다. 이렇게까지 예민한 줄 몰랐다. 저녁에 혼자 있으면서 또 계산했다. 만약 내가 대기업 갔으면, 지금쯤 전세 살고, 적금도 더 많이 들고, 부모님한테 용돈도 더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대신 뭘 얻었나. 피그마를 하루 10시간 켜놓는 일상? 기획이 세 번 바뀌는데도 웃으면서 수정하는 인내심? 개발자한테 '이거 구현 안 돼요' 들었을 때 타협하는 기술? 이게 성장인가. 은지를 만났다 주말에 은지를 만났다. 오랜만이었다. 홍대 카페에서 만났다. 은지는 여전히 밝았다. 새로 산 맥북을 자랑했다. 회사 지원금으로 샀다고. "너는 어때? 요즘 바빠?" 은지가 물었다. "응. 프로젝트가 많아서." "대기업은 프로젝트가 느려. 결재 받는 것만 한 달 걸려." 은지가 웃었다. "너는 빨리빨리 하니까 좋겠다." 그 순간 말하고 싶었다. 빠른 게 좋은 게 아니라고. 제대로 못 만든다고. 디자인 시스템도 없고 문서화도 안 되고 매번 처음부터 만든다고.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안정적이니까 좋겠다." 내가 말했다. "안정적이긴 한데, 재미는 없어." 은지가 한숨 쉬었다. "승진 경쟁도 빡세고. 다들 눈치 보면서 일해." 우리는 서로 부러워하고 있었다. "너는 자유롭게 디자인하잖아. 대표님이랑 바로 이야기할 수 있고." 은지가 말했다. 맞다. 나는 대표님이랑 직접 이야기한다. 은지는 팀장-본부장-임원 거쳐야 한다. "너는 연봉 걱정 없잖아." 내가 말했다. 맞다. 은지는 매년 연봉이 오른다. 회사 규정이 있으니까. 우리는 각자 다른 것을 포기했다. 카페를 나오면서 은지가 물었다. "후회해?" "글쎄." 진짜 모르겠다. 다시 선택하라면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웠다. 만약 다시 2018년으로 돌아간다면, 뭘 선택할까. 대기업을 가면: 지금쯤 8천만원 받고, 전세 살고, 체계적인 프로세스 안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의견이 반영되려면 몇 달 걸리고, 승진 경쟁하면서 눈치 보면서 일할 것이다. 스타트업을 가면: 지금처럼 5500만원 받고, 월세 살고, 자유롭게 의견 내지만 그게 항상 좋은 방향은 아니고, 연봉 걱정하면서 살 것이다. 둘 다 trade-off다. 문제는 나는 이미 스타트업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6년을 여기서 보냈다. 지금 대기업으로 이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능은 할까. 6년 차 스타트업 디자이너가 대기업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을까. 포트폴리오를 열어봤다. 마지막 업데이트가 1년 전이다. 정리해야 하는데 계속 미뤘다. 링크드인을 열었다. 대기업 채용 공고들이 보인다. "5년 이상 경력, 체계적인 디자인 시스템 경험." 우리 회사는 디자인 시스템이 없다. 만들자고 했는데 일정에 밀려서 못 만들었다. 이게 내 경력에 불리하게 작용할까. 새벽 2시까지 생각하다가 잤다. 월요일 아침 출근했다. 피곤했다. 슬랙을 열었다. 대표님 메시지가 떠 있었다. "디자님, 오늘 투자사 미팅 있어요. 프레젠테이션 디자인 부탁드려요." 또다. 지라를 열었다. 티켓이 17개다. 우선순위가 전부 '높음'이다.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개발팀 채널에 메시지가 올라왔다. "디자님이 만든 새 컴포넌트 너무 좋아요. 개발하기 편해졌어요👍"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수현이가 출근하면서 커피를 건넸다. "언니, 주말에 뭐 했어요?" "친구 만났어." "재밌었어요?" "응. 그럭저럭." 오전 미팅에서 대표님이 말했다. "이번 분기 목표는 MAU 50% 증가입니다. 디자인팀도 힘내주세요." 연봉 인상은 언제쯤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점심시간에 또 은지 생각이 났다. 8천만원. 2500만원 차이. 그런데 이상한 건, 아침에 받은 개발자 피드백이 계속 생각났다는 거다. "개발하기 편해졌어요." 내가 만든 게 누군가한테 도움이 됐다. 대기업에서도 이런 피드백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내 디자인이 수많은 결재 과정을 거치다가 흐지부지될까. 오후에 디자인하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디자이너가 됐을까. 돈 때문은 아니었다. 뭔가를 만드는 게 좋아서였다. 내가 만든 화면을 사람들이 쓰는 게 신기해서였다. 6년 전 선택은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단지 지금이 힘든 거다.결국 비교는 끝이 없다. 중요한 건 내가 지금 뭘 배우고 있는가.

빨간색을 더 빨갛게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을 때

빨간색을 더 빨갛게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을 때

빨간색을 더 빨갛게 해달라는 요청출근했다. 슬랙을 열었다. 메시지가 4개. 첫 번째는 기획자: "홈 배너 컬러 한 번 봐주세요." 두 번째는 개발자: "이거 언제쯤 나와요?" 세 번째는 대표님: "피그마 확인해주세요." 네 번째는 마케팅: "빨간색을 좀 더 빨갛게 해주세요." 손가락이 움직였다. Figma를 켰다. 컬러 코드를 확인했다. #D63031. 이미 충분히 빨갛다. Red 채도는 최대다. 명도도 조정했다. 이게 더 빨갛게 된다는 건... 아, 알겠다. 이건 색상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안다. 추상적 피드백의 정체 회의실에 앉았다. 마케팅 이사가 말했다. "이 빨강이 좀 약한 것 같아요. 더 강렬해야 할 것 같은데..." "강렬한 느낌이면 채도를 올리거나 명도를 내려야 하는데, 지금 상태에서는 둘 다 최대예요. 어떤 느낌을 원하시는지..." "아, 그냥 좀 더 빨갛게요." 여기가 멘탈이 부서지는 지점이다. '빨갛게'는 색상이 아니다. 감정이다. 정확히는, 내가 당신의 감정을 코드로 번역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보통 이런 피드백은 이렇게 분류된다: 1. 실제로는 다른 걸 원하는 경우 "빨강이 약해 보여요" = 실제로 원하는 건 명도가 높은 다른 색상이거나, 배경색과의 대비를 원할 수도 있다. 때론 사이즈 문제일 수도. 2. 감정적 이상향을 색상으로 표현한 경우 "더 선명하게" "더 힘있게" "더 신뢰감 있게" 같은 요청들. 색상이 아니라 심리다. 3. 진짜로 컬러를 모르는 경우 "더 빨갛게 해줄 수 있어?"라고 묻는데 #FF0000에서 더 갈 데가 없을 때. 이건 답답함의 영역이다. 4. 나는 다른 걸 봤는데 당신이 잘못 만든 거 아니야? 같은 불신 가장 심각한 피드백. 내 디자인이 아니라 내 능력을 의심받는 느낌.내가 했던 대응은 보통 이렇다: 먼저 심호흡을 한다. 3초. 화면에 안 보이게. 그 다음 몇 가지를 확인한다. 첫째, 내가 정말 #FF0000을 썼는가. (안 썼다면 업그레이드.) 둘째, 그 색상이 배경이나 주변 요소와 어떻게 조화되는가. 셋째, 내 모니터 색감이 표준인가. (사실 대부분 그렇지 않다.) 그 다음에는 질문을 한다. 부드럽게. "더 강렬해야 한다는 건 화면에서 더 먼저 눈에 띄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폰에서 봤을 때 느낌이 다르게 보이나요?" 90% 확률로 이렇게 온다: "아, 모니터에서 봤을 때는 다르게 보이더라." 이제부터가 프로페셔널 대응이다. 추상적 피드백을 번역하기 사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피드백을 받는 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거다. 첫 번째 실수: 그걸 개인 공격으로 받는 것 "내 디자인이 못났다는 뜻인가" →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안 됐다는 뜻이다." 프로젝트 초반에 색상 시스템을 설명할 때, 나는 이제 이런 식으로 말한다: "메인 빨강은 #D63031로 잡겠습니다. 이건 모바일과 PC에서 일관성 있게 보이도록 맞춘 값이고, 배경이 밝으면 더 선명하게, 어두우면 부드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만약 더 극적인 느낌이 필요하면 #FF0000도 옵션으로 두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피드백이 달라진다. 대표님: "아, #FF0000 한번 봐봐." 끝. 3초 만에 답이 나온다. 두 번째 실수: 바로 수정하려고 하는 것 "빨강을 더 빨갛게" 들었을 때, 나는 더 이상 그냥 건너뛴다. "화면 공유해서 함께 봐도 괜찮을까요?" 대부분 동의한다. 그리고 공유하는 순간, 상대방도 본다. "아, 이건 빨강이 문제가 아니라 버튼 크기가..." "실제로 봤을 땐 더 밝아 보여야 할 것 같고..." "어? 이건 예상과 다른데..." 추상적 피드백은 구체적인 맥락이 없을 때만 추상적이다.멘탈 지키면서 일하기 솔직히 말하면, 6년을 해도 이런 피드백은 짜증난다. 다만, 짜증나는 방식이 바뀌었다. 1년차 때: 마음이 부서진다. "내가 디자인을 잘 못하는 건가?" 3년차 때: 상대를 무시한다. "색상을 모르는 거네." 6년차 때: 아, 이건 내 문제가 아니고 대화 문제다. 라고 생각한다. 이제 내가 하는 일은: 첫째, 피드백을 받을 때 추측하지 않기. "더 밝게"는 명도인가 채도인가 톤인가. 묻는다. 둘째, 나는 색상 전문가라는 걸 은연중에 드러내기. 디자인팀 회의 때 "색상은 명도, 채도, 톤 세 가지 차원이 있고..." 같은 교육을 슬쩍 끼워넣는다. 그럼 다음부턴 피드백이 조금 더 구체적이다. 셋째, 결정권자와 1대1로 확인하기. 회의실에서 여러 명이 있을 땐 피드백이 아니라 의견 중복이다. "혹시 따로 5분만 시간 내실래요?" 하면 대부분 오케이. 넷째, 대안을 항상 3개 준비하기. "더 빨갛게"라는 피드백 오면, 나는 벌써 3가지를 준비했다.채도 높은 빨강 (#FF0000) 명도 낮은 빨강 (#A00000) 따뜻한 톤의 빨강 (#E85D3F)"어떤 방향이 더 맞는 것 같으신데요?" 하면서 보여준다. 그럼 상대는 선택만 하면 된다. 다섯째, 일정과 피드백은 동시에 관리하지 않기. "마감이 오늘 오후인데 색상도 봐주세요"는 절대 금지. 일정이 있으면 피드백 기간을 길게 잡는다. 재검토할 시간이 있으면 피드백도 깊어진다. 그래도 힘들 때 지금 내 모니터 옆엔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있다. "The client doesn't know what they want. That's why they hired you."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때론 이 문장이 필요하다. "빨강을 더 빨갛게"는 피드백이 아니다. 그건 신호다. 신호가 뭔가? 대부분은 "난 만족 못 해"가 아니라 "난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다. 그리고 그 뭔가를 찾는 게 내 일이다. 색상 코드를 아는 것보다, 그 신호를 읽는 게 훨씬 중요하다.결국 디자인 문제가 아니라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가 같은 언어를 쓰는지의 문제다.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