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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 03 Dec, 2025
월요일 9시 반, 슬랙 확인하다가 숨이 턱 막히는 순간
월요일 9시 반 지하철에서 내렸다. 회사까지 5분. 그 5분 동안 슬랙을 켜지 않았다. 일부러. 주말이 좋았다. 토요일엔 침대에서 유튜브 봤고, 일요일엔 카페에서 책 읽었다. 스타벅스 아니고 동네 조용한 곳. 핸드드립 마시면서 디자인 잡지 넘겼다. 폰트 이야기, 컬러 이야기. 평화로웠다. 금요일 퇴근 전에 완성한 화면이 머릿속에 있었다. 결제 플로우 7개 화면. 사흘 걸렸다. 인풋 필드 간격, 버튼 사이즈, 에러 메시지 위치. 다 맞췄다. 개발팀 채널에 피그마 링크 올렸다. "월요일에 리뷰 부탁드려요" 하고 로그아웃. 엘리베이터 안. 3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슬랙을 켰다. 21개의 알림.숨이 턱 막혔다 첫 번째 메시지. 금요일 밤 11시. 대표님. "최디자님, 결제 플로우 방향 좀 틀어야 할 것 같아요. 투자사 미팅에서 피드백 받았는데요." 두 번째. 토요일 오전 10시. 기획자. "디자님, 죄송한데 결제 단계를 2단계로 줄이는 게 어떨까요? 대표님이랑 얘기했는데..." 세 번째. 토요일 오후 3시. 개발 리드. "결제 플로우 개발 시작하려고 했는데 홀드할게요." 네 번째부터는 안 읽었다. 사무실 문 열었다. 개발자 두 명이 이미 와있었다.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나왔다. 자리 앉았다. 맥북 켰다. 피그마 열었다. 그 7개 화면이 그대로 있었다. 금요일 저녁 6시 43분. 마지막 수정 시간. 사흘이 3초가 됐다. 기획 변경의 메커니즘 스타트업에서 6년 일했다. 회사는 세 번 바뀌었다. 기획 변경은 48번쯤 겪었다. 대충 센 거다. 정확히 세면 더 많다. 변경의 패턴이 있다.금요일 저녁이나 주말에 온다. "사소한 수정"이라고 시작한다. 실제론 전체 구조가 바뀐다. 일정은 그대로다.이번도 그랬다. 기획자가 왔다. 미안하다는 표정. "디자님, 주말에 연락드려서..." "괜찮아요." 괜찮지 않았다. "대표님이 투자사에서 피드백 받으셨대요. 결제 단계가 너무 많다고. 3단계를 2단계로 줄여야 한데요." "언제까지요?" "이번 주 금요일까지는..." 오늘이 월요일이다. 금요일까지 5일. 아니, 4일 반.변수를 관리한다는 것 대표님한테 갔다. 노크하고 들어갔다. "대표님, 결제 플로우 변경 건 확인했습니다." "아, 최디자님. 죄송해요. 갑자기 바뀌어서." "투자사 피드백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나요?" 대표님이 노트북을 돌렸다. 이메일이 떠 있었다. 영어로 3줄. "Too many steps in payment flow. Consider simplifying. Users drop off at step 2." 3줄. 내가 사흘 동안 만든 7개 화면이 3줄이 됐다. "사실 데이터를 봤는데요." 내가 말했다. "이탈률이 높은 건 2단계에서 주소 입력 때문이에요. 단계 개수 문제가 아니라 인풋 필드 문제예요." "음..." 대표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은 이미 정해진 표정이었다. "그래도 일단 2단계로 줄여서 보여드리면 어떨까요? 투자 유치가 지금 중요해서요." 투자 유치. 이 단어가 나오면 끝이다. "네, 알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왔다. 피그마를 껐다. 다시 켰다. 새 페이지를 만들었다. 이름: "결제플로우_v2_20250120" v2. 버전 2. v1은 어디 갔나. 휴지통에도 안 간다. 그냥 존재하지 않게 된다. 공허함의 정체 점심시간이 됐다. 밥을 먹으러 나갔다. 개발자 한 명이 따라왔다. "디자님, 결제 플로우 다시 하시는 거예요?" "응." "헐... 금요일에 완성하신 거 엄청 좋았는데." "고마워." "근데 왜 바뀐 거예요?" "투자사 피드백." "아..." 개발자도 알았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김치찌개를 시켰다. 맛이 없었다. 아니, 맛을 모르겠다. 숟가락을 입에 넣고 씹고 삼켰다. 기계처럼. 공허함이 뭔지 알았다. 내가 만든 게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건 원래 자주 있다. 디자인은 계속 바뀐다. 문제는 이유다. 데이터 때문에 바뀐 거면 괜찮다. 사용자 피드백 때문이면 이해된다. A/B 테스트 결과 때문이면 배운다. 근데 이건 아니다. 투자사 이메일 3줄. 데이터도 없고, 사용자 리서치도 없고, 근거도 없다. 그냥 "simplify" 한 단어. 내 사흘이 한 단어에 지워졌다.변수관리라는 환상 오후 2시. 기획자, 개발 리드, 나. 회의실. "변경사항 정리할게요." 기획자가 화이트보드에 썼다.3단계 → 2단계 주소 입력 간소화 결제 수단 선택 앞으로 최종 확인 화면 삭제"최종 확인 화면을 왜 삭제해요?" 내가 물었다. "단계를 줄이려면..." "근데 최종 확인 없이 결제하면 실수 결제 늘어요. 그럼 CS 비용 올라가요." 개발 리드가 끄덕였다. "맞아요. 환불 처리 개발 공수도 만만치 않은데." 기획자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럼... 대표님께 다시 말씀드려볼게요." 30분 뒤. 기획자가 돌아왔다. "최종 확인 화면은 남기래요. 대신 다른 걸 줄여달래요." "뭘요?" "다시 회의해요." 또 회의. 이게 스타트업의 변수관리다. 변수를 관리하는 게 아니라, 변수에 관리당한다. 큰 회사였으면 프로세스가 있다. 기획 문서, 리서치 자료, 검토 단계. 느리지만 방향은 있다. 스타트업은 빠르다. 대신 방향이 매일 바뀐다. 나침반이 고장 난 배. "빠르게 실험하는 거예요." 대표님이 자주 하는 말. 실험은 좋다. 근데 실험엔 가설이 있어야 한다. 가설 없는 실험은 그냥 삽질이다. 오후 4시의 결심 새 버전을 그렸다. 2시간 걸렸다. 2단계. 깔끔하다. 심플하다. 아름답다. 근데 뭔가 부족하다. 정보 위계가 애매하다. 사용자가 헷갈릴 것 같다. 개발자한테 보냈다. "이렇게 바뀌었어요." 답장이 왔다. "오 깔끔한데요? 근데 주소 입력 필드가 여기 있으면 키보드 올라올 때 버튼이 가려지는데..." "아..." 수정했다. 30분 더. 다시 보냈다. "이건 어때요?" "좋아요! 근데 결제 수단 선택이 위로 가면 API 호출 순서를 바꿔야 하는데, 그럼 로딩 시간이..." "..." 또 수정했다. 1시간 더. 오후 4시. 버전 2.3. 개발자가 "이제 됐어요"라고 했다. 기획자가 "좋아요"라고 했다. 근데 나는 모르겠다. 이게 좋은 건지. 이게 맞는 건지. 금요일에 만든 v1이 더 나았다. 확신한다. 근데 v1은 죽었다. 결심했다. 다음부턴 초안을 두 개 만든다. 하나는 내가 생각하는 최선. 하나는 갑자기 바뀔 때를 대비한 플랜B. 시간이 두 배 걸린다. 근데 어쩌겠나. 월요일 아침에 숨 막히는 것보단 낫다. 변수 속에서 살아남기 스타트업에서 변수관리는 환상이다. 변수를 없앨 수 없다. 대신 변수를 예상할 수 있다. 내가 배운 것들:금요일 저녁 배포 금지. 주말에 바뀐다. 투자 관련 미팅 전후는 위험. 방향이 흔들린다. 대표님이 "간단한 질문인데"로 시작하면 간단하지 않다. 기획자가 "사소한 수정"이라고 하면 사소하지 않다. 개발자가 "이거 어려운데요"는 정말 어렵다는 뜻이다.그리고 하나 더. 완벽한 디자인은 없다. 완성된 디자인도 없다. 있는 건 "지금 버전"뿐이다. 내일 바뀔 수도 있고, 다음 주에 바뀔 수도 있고, 아예 폐기될 수도 있다. 이게 스타트업이다. 빠르게 망하거나, 빠르게 배우거나. 나는 후자를 택했다. 아직은. 퇴근길 7시에 나왔다. 야근은 아니래. 지하철에서 피그마를 켰다. 새로 만든 v2를 봤다. 나쁘지 않다. 익숙해지니까 괜찮아 보인다. 집에 도착했다.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다. 남자친구한테 카톡 보냈다. "오늘 힘들었어." "무슨 일?" "주말에 만든 거 다 엎어짐." "헐. 왜?" "투자사 피드백." "..." "내일은 나을까?" "응. 내일은 화요일이니까." 맞다. 내일은 화요일이다. 월요일보단 낫다. 드리블을 켰다. 다른 디자이너들의 작업을 봤다. 예쁘다. 완성도 높다. 근데 저것들도 엎어졌을까? 기획 변경 몇 번 겪었을까? 모르겠다. 드리블엔 결과만 있다. 과정은 없다. 폰을 내려놨다. 눈을 감았다. 내일은 v2를 개발팀한테 넘긴다. 다음 주엔 개발 시작한다. 그다음 주엔 테스트한다. 그리고 또 바뀐다. 아마.월요일은 항상 온다. 슬랙도 항상 켜진다. 변수는 계속 생긴다. 나는 계속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