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mer로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는데 개발자가 '이건 안 된다'고 할 때

Framer로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는데 개발자가 '이건 안 된다'고 할 때

금요일 오후 3시, 핸드오프 미팅 Framer에서 3일 동안 만든 프로토타입이다. 스크롤에 따라 헤더가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카드가 부드럽게 스택되면서 올라온다. 제스처 기반 스와이프로 다음 화면 전환. 60fps로 돌아간다. 완벽하다. "이거 봐봐. 이렇게 자연스럽게." 개발자 준호가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본다. 5초 동안 아무 말 없이 본다. 나쁜 징조다. "디자님, 이거...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심장이 철렁한다. "어려운 게 아니라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건 아닌데, 시간이..." 시간. 항상 시간이다. 스프린트는 2주 남았고, 백엔드 API도 아직이고, 다른 화면 5개가 더 남았다고 한다. 저 부드러운 애니메이션 하나 구현하려면 일주일은 걸린다고.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일단 헤더는 그냥 fixed로 고정하고, 카드 애니메이션은 빼고, 화면 전환은 기본 transition으로..." 내가 3일 동안 만든 게 30초 만에 무너진다.Framer가 준 착각 Framer는 마약이다. 좋은 의미로. 스크롤 이벤트 연결하는 데 5분. 제스처 인식 3분. 스프링 애니메이션 커브 조정 2분. 뭐든지 된다. 마치 내가 프론트엔드 개발을 정복한 것 같은 착각. "이 정도면 개발도 쉽지 않을까?" 아니다. 전혀 아니다. Framer는 프로토타이핑 툴이다. 실제 프로덕션 코드가 아니다. 저 부드러운 애니메이션 뒤에는 최적화되지 않은 리소스가 수십 개 돌아간다. 실제 앱에서 저렇게 구현하면 배터리가 2시간 만에 죽는다. 준호가 설명해줬다. "디자님이 만든 저 프로토타입, 지금 RAM 800MB 먹고 있어요. 우리 앱 전체가 100MB 목표인데." 현타가 온다. "그럼 Framer로 만드는 게 의미가 없는 거야?" "아니요, 방향성 보여주는 건 좋은데... 그걸 그대로 구현할 거라고 기대하시면 안 돼요." 기대하시면 안 된다. 이 문장이 가슴에 꽂힌다. 가능성과 현실 사이 문제는 내가 Framer에서 본 게 "가능성"이고, 개발자가 보는 건 "현실"이라는 거다. 내가 본 것:사용자가 느낄 경험 브랜드가 전달할 감성 경쟁사와 차별화되는 인터랙션 앱스토어 리뷰에 "UI 예쁘다"는 댓글개발자가 본 것:프레임 드롭 가능성 크로스 브라우징 이슈 성능 최적화 난이도 유지보수 복잡도 일정 지연 리스크둘 다 틀리지 않았다. 그게 더 화난다.월요일, 타협안 찾기 주말 내내 생각했다. 포기할 건 포기하고, 지킬 건 지켜야 한다. 준호한테 메시지 보냈다. "준호님, 제가 좀 더 공부해볼게요. 근데 질문 좀 해도 돼요?" 30분 뒤 답장. "당연하죠. 통화할까요?" 통화했다. 1시간 동안 했다. 내가 물었다. "헤더 애니메이션이 제일 중요한데, 이건 어떻게든 살릴 수 없어요?" 준호가 대안을 줬다. "transform 속성만 쓰면 돼요. 그럼 GPU 가속 받아서 부드러워요. 다만 디자인을 조금 단순하게..." "카드 스택 애니메이션은요?" "그건 라이브러리 쓰면 돼요. React Spring. 비슷하게 나올 거예요. 100% 똑같진 않지만." "스와이프 제스처는?" "이건 진짜 시간 걸려요. 다음 스프린트로 미뤄도 될까요?" 미룬다. 좋다. 전부 포기하는 것보단 낫다. 우선순위 정하는 법 이제 안다. Framer 프로토타입 만들 때부터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내 기준:브랜드 정체성 - 이건 못 버림 핵심 사용자 경험 - 이것도 못 버림 디테일한 인터랙션 - 여기서부터 협상 가능 장식적 애니메이션 - 과감히 버림헤더 애니메이션은 1번이다. 우리 앱의 아이덴티티다. 경쟁사는 다 고정 헤더다. 우리만 다르다. 이건 지킨다. 카드 전환은 2번이다. 사용자가 계속 보는 부분이다. 조금 단순해져도 부드러워야 한다. 스와이프 제스처는 3번이다. 있으면 좋지만, 버튼으로도 된다. 배경 파티클 효과는 4번이다. 예쁘지만, 없어도 된다. 준호가 "이거 Canvas 써야 되는데..." 하는 순간 바로 뺐다.개발자와 친해지는 게 답이다 3개월 전만 해도 핸드오프 미팅이 전쟁터였다. "이거 왜 이렇게 만드셨어요?" "디자인이 그런데요."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해요?" "그건 개발자가 알아서..." 둘 다 방어적이었다. 서로 영역 침범당할까봐. 지금은 다르다. 준호랑 일주일에 한 번씩 30분 커피 챗을 한다. 디자인 얘기도 하고, 개발 얘기도 듣는다. 준호가 알려준 것들:CSS transform이 왜 빠른지 리플로우가 뭔지 React 컴포넌트 라이프사이클 번들 사이즈가 왜 중요한지내가 알려준 것들:8pt 그리드가 왜 필요한지 디자인 시스템이 개발에도 이득인 이유 피그마 컴포넌트 구조가 React랑 비슷한 점 사용자 테스트에서 나온 피드백이제 서로 언어를 안다. 내가 "이 애니메이션 GPU 가속 되게 만들 수 있어?"라고 물으면, 준호가 "네, transform 쓰면 돼요"라고 바로 답한다. 준호가 "이 컴포넌트 재사용 가능하게 만들어주시면 좋겠어요"라고 하면, 내가 "Variant 파서 Props 넘길 수 있게 해줄까?"라고 답한다. 통역이 필요 없어졌다. 현실적 프로토타입 만들기 이제 Framer 쓰는 방식이 바뀌었다. 예전: 최대한 화려하게. 모든 인터랙션 다 넣기. 개발자가 알아서 하겠지. 지금: 구현 가능한 선에서. 우선순위 명확하게. 개발자랑 미리 논의. 새로운 프로세스:러프 프로토타입 만들기 (1일) 준호한테 15분 퀵 리뷰 (기술적 제약 확인) 수정해서 디테일 프로토타입 (1일) 다시 30분 미팅 (구현 방법 논의) 최종 정리해서 핸드오프2단계에서 준호가 말한다. "이 부분은 쉬워요. 30분이면 돼요." "여기는 라이브러리 써야 해요. 하루 정도요." "이건... 진짜 어려운데, 꼭 필요해요?" 그럼 나도 판단한다. 꼭 필요한가? 다른 방법은? 다음 버전으로 미룰 수 있나? 시간이 더 걸리긴 한다. 하지만 결과물이 실제로 나온다. 예전엔 프로토타입만 예뻤다. 실제 앱은 달랐다. 지금은 80% 비슷하다. 나머지 20%는 타협이다. 타협은 패배가 아니다 디자이너로서 제일 싫은 단어가 "타협"이었다. "타협하면 디자인이 망가진다." "타협은 프로답지 않다." "애플은 타협 안 한다." 거짓말이다. 애플도 타협한다. 우리가 모를 뿐이다. 타협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거다. 무한한 시간, 무한한 인력, 무한한 예산은 없다. 스타트업은 특히. 좋은 타협:핵심은 지키고 디테일을 양보 지금 버전에선 포기, 다음 버전에 추가 다른 방법으로 비슷한 효과나쁜 타협:브랜드 정체성 포기 사용자 경험 해치는 결정 그냥 귀찮아서 대충준호가 "카드 애니메이션 빼요"라고 했을 때, 나는 "그럼 Fade 트랜지션이라도 넣자"고 했다. 완전히 없애는 것보단 낫다. 준호도 동의했다. 10분이면 된다고. 결과: 내 프로토타입보단 덜 화려하다. 하지만 앱이 빠르고, 일정도 맞췄고, 사용자는 만족한다. 앱스토어 리뷰에 "속도 빠르네요" 댓글 달렸다. 타협했지만 이겼다. 다음 프로젝트는 다르게 다음 주부터 새 프로젝트다. 온보딩 플로우 리디자인. 이번엔 처음부터 다르게 한다. 1단계: 와이어프레임 (피그마) 2단계: 준호랑 30분 브레인스토밍 3단계: 프로토타입 (Framer, 단 구현 가능한 것만) 4단계: 주간 체크인 (진행 상황 공유) 5단계: 핸드오프 (서프라이즈 없음) 준호가 말했다. "이번엔 좀 더 여유 있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유. 좋은 단어다. 디자이너의 새로운 역할 예전 생각: 디자이너는 예쁘게만 만들면 된다. 구현은 개발자 몫. 지금 생각: 디자이너는 구현 가능한 아름다움을 만든다. 개발자와 함께. 역할이 바뀌는 게 아니다. 확장되는 거다. 여전히 해야 할 것:사용자 리서치 인터페이스 디자인 비주얼 아이덴티티 프로토타이핑추가로 하는 것:기술적 제약 이해 개발자와 협업 언어 우선순위 판단 현실적 일정 감각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더 재밌다. 준호가 "디자님, 이번 건 정말 잘 나올 것 같아요"라고 할 때, 그게 제일 좋다. 개발자가 기대한다는 건, 실제로 나온다는 뜻이다. Framer 프로토타입은 여전히 예쁘다. 하지만 이제 그게 전부가 아니다. 실제 앱도 예쁘다. 조금 덜 화려할 뿐. 하지만 실제로 존재한다. 존재하는 디자인이 상상 속 완벽함보다 낫다.금요일 6시. 준호가 슬랙 메시지 보냈다. "디자님, 헤더 애니메이션 구현 끝났어요. 확인해보세요." 앱 켰다. 부드럽다. 내 프로토타입이랑 거의 똑같다. 심장이 뛴다. "준호님 천재" 라고 답장 보냈다. 준호가 웃는 이모지 보냈다. 이게 협업이다.

요구사항이 계속 바뀌는데 일정은 그대로인 이상한 일정표

요구사항이 계속 바뀌는데 일정은 그대로인 이상한 일정표

월요일 아침의 일정표 일정표를 펼쳤다. 2주. 메인 화면 리뉴얼. 가능하다고 했다. 월요일 오전, 대표님이 슬랙에 메시지를 보냈다. "온보딩 플로우도 같이 갈까요?" 물음표가 붙어있지만 질문이 아니다. 일정은 그대로다. 2주. 화요일, 기획자가 왔다. "여기에 튜토리얼 추가하면 어떨까요?" 눈이 반짝인다. 좋은 아이디어인 건 맞다. 일정은? 그대로다. 2주. 수요일, 개발팀장이 말했다. "결제 플로우도 이번에 정리하죠." 어차피 만지는 거. 2주는 여전히 2주다.목요일 오후, 나는 지라 티켓을 세고 있었다. 12개에서 23개가 됐다. 스프린트는 하나다. 스코프 크리프라는 괴물 이게 스코프 크리프다. Scope Creep. 범위가 슬금슬금 기어간다. 처음엔 작았다. "메인 화면만 바꾸자." 깔끔하다. 할 만하다. 그런데 회의를 할 때마다 뭔가 붙는다. "여기 마이크로인터랙션 넣으면 좋겠어요." "이왕이면 다크모드도." "최디자님, 이건 금방이죠?" 금방인 건 없다. 디자인에 금방인 건 없다. 컴포넌트 하나 바꾸면 12개 화면이 영향받는다. 인터랙션 하나 추가하면 프로토타입 다시 만든다. 다크모드는 컬러 토큰 전체를 재정의하는 거다.기획자는 악의가 없다. 대표님도 마찬가지다. 개발팀장도. 다들 더 좋은 제품을 만들고 싶은 거다. 이해한다. 하지만 일정표는 그걸 이해하지 않는다. 금요일 아침, 나는 타임라인을 다시 그렸다. 리얼한 걸로. 메인 화면 리뉴얼: 3일 온보딩 플로우: 2일 튜토리얼 디자인: 1.5일 결제 플로우 정리: 2일 마이크로인터랙션: 1일 다크모드: 3일 12.5일. 2주는 10일이다. 나는 이 표를 보여주지 않았다. 어차피 일정은 안 늘어난다. 스타트업에서 일정 지키는 법 6년 하면서 배운 것들이 있다. 첫째, 버퍼를 숨긴다. 2주면 3주로 잡는다. 속으로. 말은 2주라고 한다. 그래야 실제로 2주 반에 끝낸다. 처음엔 정직하게 말했다. "이건 3주 걸립니다." 그러면 "2주 안에 안 될까요?"가 돌아온다. 결국 2주로 잡힌다. 지금은 다르다. "2주요." 하고 3주 일정으로 일한다. 마지막 3일은 숨겨둔 카드다. 둘째, 스코프를 문서화한다. 월요일에 노션 페이지를 만들었다. "이번 스프린트 스코프"라고.메인 화면 리뉴얼 (5개 화면) 기존 디자인 시스템 활용 다크모드 제외 애니메이션 최소화대표님이 "온보딩도?"라고 물었을 때 이 페이지를 공유했다. "네, 가능합니다. 대신 이 중에 뭘 빼드릴까요?" 침묵. 10초. "아, 그럼 다음 스프린트에." 문서의 힘이다. 말로 하면 흐릿하다. 글로 쓰면 명확해진다. 셋째, 단계를 나눈다. 전부 다 한 번에 하려고 하면 망한다. 쪼갠다. v1: 핵심 기능만 v1.5: 인터랙션 추가 v2: 다크모드 이렇게 말하면 거부감이 덜하다. "안 돼요"가 아니라 "나중에요"니까. 기획자가 "튜토리얼은요?"라고 물었다. "좋아요. v1.5에 넣죠. 지금은 v1 집중하고요." 됐다. 다음 스프린트로 밀렸다. 넷째, 개발자를 편으로 만든다. 수요일 오후, 개발자 준혁이랑 커피 마셨다. "형, 결제 플로우도 이번에 하자는데." "에이, 우리 일정도 빡빡한데." "그쵸?" 개발자가 "일정 빡빡해요"라고 하면 무게가 다르다. 디자이너가 말하면 "디자인은 빠르잖아요"라는 말을 듣는다. 개발자가 말하면? 다들 끄덕인다. 준혁이는 회의에서 말해줬다. "결제는 다음 스프린트가 나을 것 같은데요. 이번 건 QA만 2일 걸립니다." 감사합니다 준혁 형. 다섯째, 진짜 중요한 건 양보 안 한다. 목요일, 대표님이 말했다. "메인 컬러 좀 더 밝게 할까요?" "지금 테스트한 거랑 접근성 기준 통과한 건데, 바꾸면 다시 검증해야 해요. 일정 3일 더 필요합니다." 안 바뀌었다. 디자이너는 착하면 안 된다. 전부 다 "네" 하면 일정은 지옥이 되고 결과물은 망한다. 중요한 건 지킨다. 나머지는 협상한다. 금요일 오후의 일정표 금요일 오후, 일정표는 이렇게 정리됐다. 이번 스프린트 (2주):메인 화면 리뉴얼 (5개 화면) 기존 컴포넌트 활용 라이트모드만다음 스프린트 (2주):온보딩 플로우 신규 제작 튜토리얼 추가 마이크로인터랙션3차 스프린트:다크모드 결제 플로우 개선깔끔하다. 현실적이다. 할 수 있다. 대표님이 물었다. "이렇게 나누면 언제 다 끝나요?" "6주요. 한 번에 하면 8주 걸립니다." "왜요?" "일정 밀리고, 다시 하고, 버그 나고, 고치고. 그러면 8주예요." 대표님이 끄덕였다. "오케이, 단계별로 가죠." 승리. 이게 스타트업이다. 완벽한 일정표는 없다. 있는 건 협상 가능한 일정표다. 요구사항은 계속 바뀐다. 그건 못 막는다. 하지만 일정을 지킬 순 있다. 스코프를 관리하면 된다. 월요일 아침, 새 스프린트가 시작됐다. 일정표는 깔끔하다. 화요일에 뭐가 추가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은 디자인이나 하자. 피그마 켰다. 컴포넌트 정리부터.일정은 지키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다.

회의 중 화면 공유하면서 실시간 수정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회의 중 화면 공유하면서 실시간 수정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또 시작이다 회의실 들어갔다. 노트북 열었다. HDMI 꽂았다. 피그마 켜졌다. "아, 디자이너님 화면 공유 부탁드려요." 이 말이 나오는 순간 알았다. 오늘도 실시간 수정의 날이다.회의 안건은 '메인 화면 개편안 공유'였다. 공유만. 그런데 회의실 문 닫히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달라진다. "여기 이 버튼 색상이요..." 시작됐다. 2초의 선택 화면 공유 상태에서 피드백 받는 건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 "네, 회의 끝나고 반영해서 다시 공유드릴게요." 둘. "아, 이렇게요?" 하면서 바로 Cmd+D로 복사하고 색상 바꾸기. 나는 항상 둘을 선택한다. 왜냐면 하나를 선택하면 회의가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일단 보고 싶은데요." 이 말이 나온다. 결국 둘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2초 만에 판단한다. 이거 바로 고칠 수 있나 없나. 버튼 색상 변경: 가능. 5초. 텍스트 수정: 가능. 3초. 레이아웃 변경: 불가능. 20분. 컴포넌트 구조 변경: 불가능. 3일.가능한 건 바로 한다. 불가능한 건 "이건 구조적으로 수정이 필요해서 시간이 좀 필요해요" 라고 말한다. 근데 문제는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에 있는 것들이다. 애매한 것들 "이 카드 간격이 좀 더 넓었으면 좋겠어요." 간격. Padding 값 하나 바꾸면 끝이다. 8px을 12px로. 가능하다. 근데 카드가 Auto Layout으로 묶여 있고, 그 안에 텍스트랑 이미지가 있고, 반응형까지 고려해야 한다면. 바꾸는 건 3초인데 확인하는 건 5분이다. 회의실에서 5분은 영원이다. "음... 잠깐만요." 하면서 간격 바꾼다. 화면에 바로 반영된다. 모두가 본다. "아 이게 더 낫네요." 다행이다. 괜찮게 나왔다. 근데 가끔은. "음... 아닌 것 같은데." Cmd+Z를 누른다. 다들 보는 앞에서. 이 순간이 제일 민망하다. 실시간의 양면 피그마 실시간 협업은 마법이다. 여러 명이 동시에 작업할 수 있다. 커서가 움직이는 게 보인다. 수정이 바로 반영된다. 근데 회의실에서는 이게 독이 된다. 다들 내 커서를 본다. 내가 뭘 클릭하는지 본다. 어디를 망설이는지 본다. "아 거기 아니고 위에 거요." 알아. 지금 찾고 있어. 레이어가 127개야. 화면 공유 상태에서 레이어 패널 스크롤하는 건 공개 처형이다. 얼마나 정리 안 했는지 다 보인다. "레이어 이름 좀..." 이라고 말하는 개발자 목소리가 들린다. 미안해. Rectangle 347까지 있어. 나도 알아.그래도 실시간 수정을 계속하는 이유가 있다. 회의 시간이 반으로 준다. "이렇게 해주시고, 저렇게 해주시고, 그렇게 해주세요" 리스트 받아서 나중에 하면 2시간 걸린다. 작업 1시간, 다시 공유하고 피드백 받는 데 1시간. 회의실에서 바로 하면 30분이다. 끝나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간다. 효율적이다. 프로페셔널하다. 근데 즉흥적이다. 즉흥과 전문성 사이 디자인은 생각이 필요하다. 여백을 12px로 할지 16px로 할지는 그냥 정하는 게 아니다. 토큰 시스템 확인한다. 다른 화면이랑 일관성 맞춘다. 모바일 반응형 체크한다. 이 과정이 필요하다. 근데 회의실에서는 시간이 없다. "음... 16으로 할게요." 왜요? 라고 물으면 대답은 "더 나아 보여서요." 전문가답지 않다. 감으로 하는 것 같다. 실제로 감으로 한다. 6년 차 감이지만. 회의 끝나고 자리 돌아와서 다시 본다. 16이 맞나. 토큰 확인한다. Spacing-md가 16이다. 맞다. 다행이다. 가끔은 틀리다. 그럼 다시 고친다. 슬랙으로 "수정했어요" 보낸다. "아까 회의에서 확인했는데요?" 미안. 아까는 틀렸어. 관객 앞의 작업 화면 공유하고 디자인하는 건 관객 앞에서 그림 그리는 것과 같다. 보통은 작업실에서 혼자 한다. 망쳐도 Cmd+Z 누르면 된다. 아무도 모른다. 근데 회의실에서는 다르다. 실수하면 다 본다. "아 실수하셨네요" 라고 친절하게 말해준다. 알아. 나도 봤어. 그래도 침착해야 한다. 당황하면 안 된다. 프로니까. "네, 수정했습니다." 담담하게 말한다. 속으로는 심장이 뛴다. 제일 무서운 건 버벅이는 거다. "이 컴포넌트가 어디 있더라..." 레이어 패널 스크롤한다. 없다. 검색한다. 오타 났다. 다시 검색한다. 찾았다. 이 과정이 30초. 회의실에서 30초는 30분처럼 느껴진다. "아, 찾으시는 동안 다른 안건 먼저 볼까요?" 차라리 그게 낫다. 학습된 즉흥성 처음에는 무서웠다. 실시간 수정 요청 오면 "나중에 해올게요" 했다. 근데 3년 차쯤 되니까 달라졌다. 피그마 단축키가 손에 익었다. Cmd+D, Cmd+G, Cmd+Shift+K. 생각 없이 나간다. 컴포넌트 구조가 머릿속에 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안다. 찾는 데 3초. 토큰 시스템이 체화됐다. 8, 12, 16, 24. 고민 없이 선택한다. 즉흥적으로 하는데 전문적이다. 이상하다. 근데 이게 시니어의 영역인 것 같다. 주니어는 시간 필요하다. 생각하고 확인하고 수정한다. 시니어는 바로 한다. 생각과 확인이 동시에 일어난다. 회의실에서 실시간 수정하는 건 시니어의 특권이자 의무다. 가끔 후회한다 회의 끝나고 자리 돌아온다. 방금 수정한 거 다시 본다. "아... 이거 아닌데." 회의실에서는 괜찮아 보였다. 큰 화면에 띄우니까. 다들 보니까. 근데 실제 사이즈로 보니까 이상하다. 버튼이 너무 크다. 여백이 어색하다. 컬러가 안 맞다. 다시 고친다. 아까 회의에서 확인받은 건데. 슬랙 보낸다. "한 번 더 수정했어요." "또요?" 미안. 근데 이게 맞는 거다. 아까 건 틀렸어. 가끔 생각한다. 회의에서 실시간 수정 안 하고 "나중에 반영할게요" 하는 게 나을까. 그러면 혼자 천천히 작업할 수 있다. 여러 옵션 만들어본다. 토큰 제대로 확인한다. 근데 시간이 두 배 걸린다. 회의도 길어진다. 결정도 느려진다. 빠른 게 중요한 스타트업에서는 즉흥성이 필요하다. 완벽함보다 속도. 나중에 고치면 된다. 디자인은 원래 반복이다. 개발자의 시선 회의 끝나고 개발자가 말한다. "디자이너님 피그마 되게 빠르시네요." 칭찬인가 싶다. "근데 저희는 그렇게 빠르게 못 만들어요." 현실이다. 내가 5초 만에 수정하는 거, 개발자는 30분 걸린다. CSS 수정하고 커밋하고 배포하고. "회의에서 쉽게 바꾸시니까 쉬운 줄 아세요, 대표님이." 미안해. 그건 의도가 아니었어. 실시간 수정의 부작용이다. 디자인이 쉬워 보인다. 금방 바뀌니까. 개발도 그렇게 쉬운 줄 안다. "그냥 색상만 바꾸면 되잖아요." 안 돼. 변수 찾아야 하고 빌드해야 하고 테스트해야 해. 요즘은 조심한다. 회의에서 실시간 수정하기 전에 말한다. "이건 디자인상으로만 바꿔볼게요. 개발 공수는 따로 확인 필요해요." 선 긋기. 피그마 수정과 실제 구현은 다르다는 거. 대표님이 말한다. "왜요? 금방 되는 거 아니에요?" 안 돼. 설명한다. 3분. 이해한다. 아니, 이해하는 척한다. 다음 회의 때 또 묻는다. 줄타기의 기술 회의실 실시간 수정은 줄타기다. 너무 빨리 하면: 디자인이 쉬워 보인다. 막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 전문성 의심받는다. 너무 느리면: 답답해한다. "이거 하나 바꾸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적당히 빠르게, 적당히 신중하게. 바꾸면서 설명한다. "여기 여백을 늘리면 시각적 위계가 명확해지는데, 토큰 시스템상 16이 적절해 보입니다." 전문 용어 살짝 섞는다. 시각적 위계. 토큰 시스템. 일관성. 그러면 쉬워 보이지 않는다. 프로페셔널해 보인다. 근데 너무 많이 쓰면 잘난 척으로 보인다. 밸런스. 결국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바로 고쳐야 할 것: 간단한 것. 5초 안에 끝나는 것. 색상, 텍스트, 간격. 나중에 고칠 것: 복잡한 것. 구조 변경. 컴포넌트 수정. 반응형. 회의에서는 빠른 것만 한다. 나머지는 "검토 후 반영할게요." 이 구분이 명확해야 한다. 근데 가끔 경계가 모호하다. 그럴 땐 일단 해본다. 5초 지나면 멈춘다. "이건 시간 필요해요." 5초 룰. 내가 만든 규칙이다. 그래도 계속한다 실시간 수정의 문제는 많다. 즉흥적이다. 실수한다. 나중에 후회한다. 개발자 힘들게 한다. 디자인이 쉬워 보인다. 근데도 계속한다. 왜냐면 이게 협업이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혼자 완벽하게 만들어서 던져주는 게 아니다. 같이 보면서 만든다. 기획자가 말한다. "이 텍스트가 좀 더 강조됐으면 좋겠어요." 바로 Bold 적용한다. "이렇게요?" "오 좋은데요." 대화다. 캐치볼이다. 나중에 혼자 수정해서 공유하면 캐치볼이 아니다. 일방적 전달이다. 회의실 실시간 수정은 비효율적이지만 협업적이다. 완벽하지 않지만 함께 만든다. 그게 스타트업이고, 그게 내가 배운 방식이다. 익숙해진다 이제는 자연스럽다. 회의 들어가면 노트북 열고 피그마 켠다. 화면 공유 준비한다. "디자이너님 화면 공유 부탁드려요." "네." 바로 켠다. 피드백 나온다. 바로 수정한다. 레이어 찾는다. 3초. 컴포넌트 수정한다. 5초. "오 괜찮은데요." "감사합니다." 다음 피드백. 리듬이 생긴다. 회의가 빨라진다. 30분 안건이 15분에 끝난다. 모두가 좋아한다. 효율적이다. 나도 좋아한다. 익숙하다. 근데 가끔 생각한다. 이게 맞는 방식일까. 디자이너는 원래 이렇게 일하는 걸까. 모르겠다. 정답은 없다. 회사마다 다르다. 팀마다 다르다. 우리 팀은 이렇게 한다. 빠르게 함께. 완벽하지 않지만 계속 나아간다. 실시간 수정하면서 배운다. 어떤 게 빨리 되고 어떤 게 시간 걸리는지. 6년 차가 되니까 안다. 경계선이 어디인지. 그 선 위에서 줄을 탄다. 때로는 떨어진다. 다시 올라간다.회의 끝났다. 노트북 닫는다. 바뀐 게 17군데다. 나중에 다시 봐야겠다. 일단 커피.

감각적으로 해주세요, 이 한 문장으로 시작된 전쟁

감각적으로 해주세요, 이 한 문장으로 시작된 전쟁

오전 10시 27분, 슬랙 알림 "최디자님, 어제 보내주신 랜딩페이지 시안 봤어요. 전체적으로 좋은데, 좀 더 감각적으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키보드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감각적으로. 이 세 글자가 오늘도 왔다.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답장했다. "넵, 어떤 방향으로요?" 물어봐야 한다. 안 물어보면 3번 수정한다. "음... 그냥 좀 더 세련되고 감각적인 느낌이요. 아시잖아요 ㅎㅎ" 모른다. 진짜 모른다.감각이라는 블랙홀 6년 동안 받은 피드백을 정리해봤다. 취미는 아니고 생존 본능이다."감각적으로" 27번 "세련되게" 19번 "고급스럽게" 15번 "트렌디하게" 12번 "힙하게" 8번합계 81번. 이걸 언어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시도해봤다. "감각적으로"를 해석하는 5단계: 1단계: 일단 받아적는다. "네 알겠습니다." 2단계: 레퍼런스를 요청한다. "어떤 느낌이신가요?" 3단계: 구체적 질문을 던진다. "컬러 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4단계: 3개 방향을 제시한다. A, B, C 중 고르세요. 5단계: 선택받은 방향으로 간다. 그리고 다시 "감각적으로" 듣는다. 무한루프다. 개발자 승우가 옆에서 웃었다. "또야?" "응. 감각적으로래." "그거 우리한테는 '알아서 잘 해주세요'거든." 맞다. 디자이너한테는 "당신 감각 믿어요, 근데 제 마음에 안 들면 다시요"다.번역 작업의 시작 감각을 언어로 바꾸는 건 번역이다. 한국어를 디자인으로, 디자인을 시각으로, 시각을 감정으로. 그리고 그걸 다시 Figma 레이어로. 오늘 전략은 이랬다. 1차: 레퍼런스 수집 "혹시 레퍼런스 있으세요?" 10분 뒤 답장. "음 딱히 없는데, 그냥 요즘 트렌드 있잖아요." 트렌드. 좋아. Pinterest 켰다. "modern landing page 2024" 검색. 100개 봤다.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Sans-serif 볼드체 여백 많이 그라데이션 살짝 3D 오브젝트 포인트 다크모드 기반이걸 "감각적"이라고 부르는 구나. 2차: 구체화 시도 슬랙 다시 켰다. "감각적인 방향으로 3가지 제안드릴게요. A. 미니멀 + 타이포 강조 (애플 스타일) B. 그라데이션 + 글래스모피즘 (요즘 트렌드) C. 다크모드 + 네온 포인트 (테크 감성) 어떤 게 가까우세요?" 5분 뒤. "음 B랑 C 섞은 느낌?" 합격이다. 방향이 나왔다.전쟁의 본질 문제는 여기서 시작이다. "B랑 C 섞은 느낌"을 만들었다. 4시간 걸렸다. 다크 배경에 그라데이션 카드. 네온 블루 포인트. 글래스모피즘 버튼. 자신 있었다. 이번엔 한 번에 간다. 슬랙에 링크 올렸다. "확인 부탁드려요." 30분 뒤. "오 좋아요! 근데 좀 더 감각적으로 다듬어주실 수 있을까요?" 키보드를 덮었다. 잠깐 화장실 갔다. 거울 봤다. "진정해." 혼잣말. 돌아와서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아쉬우신가요?" "음 전체적인 느낌이요. 뭔가 조금 더?" 조금 더. 이게 답이다. "조금 더"는 디자이너가 채워야 할 빈칸이다. 감각의 번역법 6년 하면서 배운 거. 감각은 숫자가 아니다. 감각은:8px을 12px로 바꾸는 게 아니다 #000000을 #1A1A1A로 바꾸는 게 아니다 폰트 사이즈를 2pt 키우는 게 아니다감각은 공기다. 요소와 요소 사이, 색과 색 사이, 글자와 여백 사이. 그 사이를 채우는 호흡. 구체적으로 하면 이렇다. 공간감 조정섹션 간 여백: 120px → 160px 숨 쉴 공간 만들기컬러 온도차가운 블루: #0066FF → 따뜻한 블루: #0052FF 1도 차이가 느낌을 바꾼다타이포 리듬제목: 48px/1.2 본문: 16px/1.6 행간이 리듬이다디테일 레이어버튼에 미세한 그림자: 0 2px 8px rgba(0,0,0,0.08) 안 보여도 느껴진다3시간 더 걸렸다. 수치상으론 미세하다. 8px 차이, 색상 코드 한 자리 차이. 근데 화면은 완전히 달라졌다. 오후 7시 13분, 승인 "오 이거다! 딱 이 느낌이에요!" 허탈하게 웃었다. 뭐가 달라졌는지 설명할 수 있을까. 못 한다. 나도 정확히 뭘 바꿨는지 설명 못 한다. 그냥 손이 움직였다. 6년 동안 쌓인 감각이 손을 움직인 거다. 이게 디자이너다. 말로 안 되는 걸 시각으로 만드는 사람. 추상을 구체로 바꾸는 번역가. "감각적으로"라는 주문을 받으면, 100개의 레퍼런스를 보고, 10개의 시안을 만들고, 3번을 수정하고, 1개를 완성한다. 그 과정에서:Pinterest 100장 Dribbble 50개 Figma 레이어 237개 커피 4잔 한숨 12번이게 쌓여서 "감각"이 된다. 밤 10시, 퇴근길 지하철에서 인스타그램 봤다. 광고가 뜬다. 어떤 쇼핑몰. 랜딩페이지가 별로다. 여백이 없다. 컬러가 시끄럽다. 타이포가 답답하다. 스크린샷 찍었다. 내일 팀원들한테 보여줄 거다. "이렇게 하지 말자"고. 직업병이다. 세상 모든 화면이 레이어로 보인다. 모든 디자인이 분석 대상이다. "감각적으로"라는 말이 어려운 이유. 감각은 학습이 아니라 축적이기 때문이다. 100개를 보고 나서야 101번째가 보인다. 책으로 배울 수 없다. 강의로 얻을 수 없다. 그냥 만들어야 한다. 매일. 수백 번.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아, 이 정도면 감각적이다"가 손끝에 온다.내일도 누군가 말할 거다. "감각적으로 해주세요." 그럼 또 번역하겠지. 81번째 전쟁.

대기업 동기가 연봉 올랐다는 SNS 게시물을 본 후

대기업 동기가 연봉 올랐다는 SNS 게시물을 본 후

인스타를 보지 말 걸 점심시간에 인스타를 열었다. 실수였다. 대학 동기 은지의 스토리가 떴다. "연봉 협상 끝! 올해도 화이팅💪" 뒤에 선명한 8천만원대 연봉 계약서 일부가 보였다. 물론 숫자는 가려놨지만, 작년에 7천이라고 했으니 계산이 됐다. 나는 5500만원이다. 작년이랑 똑같다. 은지랑 나는 같은 학교, 같은 과, 같은 해에 졸업했다. 둘 다 디자이너로 시작했다. 차이는 은지는 대기업 계열사로, 나는 스타트업으로 갔다는 것뿐이다. 6년 전 선택이었다. 국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생각났다. 8천. 5500. 2500만원 차이. 한 달이면 200만원 넘게 차이 난다. 내 월세 세 달 치다. "디자, 밥 안 먹어?" 팀원 수현이가 물었다. 나는 숟가락을 들고 있었지만 입으로 가져가질 않았다. "먹고 있어." 거짓말이었다.6년 전으로 돌아가면 2018년 겨울이었다. 은지랑 나는 스타벅스에서 만났다. 둘 다 여러 회사에서 오퍼를 받은 상태였다. "나는 S전자 계열사 갈 것 같아." 은지가 말했다. "연봉은 좀 낮은데, 안정적이잖아." 당시 은지 오퍼는 3800만원이었다. 내 스타트업 오퍼는 3500만원. "나는 스타트업 갈래." 내가 말했다.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대기업은 프로세스가 너무 많잖아." 진심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넌 능력 있으니까 금방 올라갈 거야." 은지가 웃었다. 6년이 지났다. 은지는 8천만원이 됐다. 나는 5500만원이다. 더 많이 배웠나? 글쎄. 대기업은 프로세스가 많다고 했는데, 스타트업은 프로세스가 아예 없다. 매번 즉흥이다. 디자인 시스템 만들자고 해도 일정에 밀려서 못 만든다. 개발자들은 바쁘고, 기획자들은 자꾸 바뀌고, 대표님은 애플처럼 하라고만 한다. 은지는 체계적인 디자인 시스템 안에서 일한다. 툴도 최신이고, 교육도 받고, 컨퍼런스도 회사 돈으로 간다. 나는 피그마 프로 요금도 내 돈이다. 오후에 디자인하면서도 계속 생각났다. 선택을 잘못한 건가.스타트업의 낭만 처음 입사했을 때는 달랐다. 대표님이 직접 나를 면접했다. "우리는 제품을 만들고 있어요. 단순히 디자인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거죠." 멋있었다. 정말로. 첫 달에는 서비스 전체를 다시 디자인했다. 개발자들이랑 밤새 의견 나누고, 프로토타입 만들고, 유저 테스트하고. 회사에서 자고 새벽 라면 먹고. 피곤했지만 재밌었다. "디자님 덕분에 완전 달라졌어요!" 개발팀장이 그렇게 말했을 때, 진짜 뿌듯했다. 2년 차 때는 리브랜딩을 주도했다. 로고부터 컬러 시스템까지 전부. 대행사도 안 쓰고 내가 다 했다. 포트폴리오에 넣을 만한 프로젝트였다. 3년 차 때 디자인 리드가 됐다. 연봉은 4500만원으로 올랐다. 1000만원 올랐다고 좋아했다. 그때까지는 좋았다. 4년 차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회사가 커지면서 투자를 받았다.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게 많아졌다. "성장"이라는 단어가 매일 들렸다. 디자인보다 속도가 중요해졌다. "일단 빨리 만들어주세요. 나중에 개선하죠." 나중은 안 왔다. 5년 차에 5500만원이 됐다. 500만원밖에 안 올랐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요." 대표님이 미안해했다. 6년 차인 지금도 5500만원이다. "올해는 투자 유치가 중요해서요." 낭만은 어디로 간 걸까.숫자로만 보면 계산을 해봤다. 6년간 내가 번 돈: 약 2억 7천만원 6년간 은지가 번 돈: 약 3억 5천만원 8천만원 차이다. 여기에 복리후생을 더하면 더 벌어진다. 은지는 4대 보험 회사가 다 내주고, 점심 식대 지원받고, 교통비 나오고, 연차도 자유롭게 쓴다. 우리는 점심 각자 사 먹는다. 구내식당 같은 건 없다. 연차는 자유롭게 쓴다고 하는데, 팀원이 3명뿐이라 눈치 보인다. 대기업은 스톡옵션도 있다던데, 우리도 있긴 하다. 근데 회사가 상장할 가능성은 솔직히 모르겠다. 은지는 강남에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전세 3억에 대출 1억 받아서. "회사 다니면서 모았어." 나는 마포 원룸에 월세로 산다. 65만원. 6년째 월세다. 전세 대출받으려고 해도 연봉이 낮아서 한도가 적다. "그래도 네가 더 자유롭잖아." 남자친구가 그렇게 말했다. 걔도 개발자인데, 스타트업 다닌다. 연봉은 나보다 좀 높다. 6800만원. "자유로워서 뭐해. 돈이 없는데." 쏘아붙였다. 나도 놀랐다. 이렇게까지 예민한 줄 몰랐다. 저녁에 혼자 있으면서 또 계산했다. 만약 내가 대기업 갔으면, 지금쯤 전세 살고, 적금도 더 많이 들고, 부모님한테 용돈도 더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대신 뭘 얻었나. 피그마를 하루 10시간 켜놓는 일상? 기획이 세 번 바뀌는데도 웃으면서 수정하는 인내심? 개발자한테 '이거 구현 안 돼요' 들었을 때 타협하는 기술? 이게 성장인가. 은지를 만났다 주말에 은지를 만났다. 오랜만이었다. 홍대 카페에서 만났다. 은지는 여전히 밝았다. 새로 산 맥북을 자랑했다. 회사 지원금으로 샀다고. "너는 어때? 요즘 바빠?" 은지가 물었다. "응. 프로젝트가 많아서." "대기업은 프로젝트가 느려. 결재 받는 것만 한 달 걸려." 은지가 웃었다. "너는 빨리빨리 하니까 좋겠다." 그 순간 말하고 싶었다. 빠른 게 좋은 게 아니라고. 제대로 못 만든다고. 디자인 시스템도 없고 문서화도 안 되고 매번 처음부터 만든다고.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안정적이니까 좋겠다." 내가 말했다. "안정적이긴 한데, 재미는 없어." 은지가 한숨 쉬었다. "승진 경쟁도 빡세고. 다들 눈치 보면서 일해." 우리는 서로 부러워하고 있었다. "너는 자유롭게 디자인하잖아. 대표님이랑 바로 이야기할 수 있고." 은지가 말했다. 맞다. 나는 대표님이랑 직접 이야기한다. 은지는 팀장-본부장-임원 거쳐야 한다. "너는 연봉 걱정 없잖아." 내가 말했다. 맞다. 은지는 매년 연봉이 오른다. 회사 규정이 있으니까. 우리는 각자 다른 것을 포기했다. 카페를 나오면서 은지가 물었다. "후회해?" "글쎄." 진짜 모르겠다. 다시 선택하라면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웠다. 만약 다시 2018년으로 돌아간다면, 뭘 선택할까. 대기업을 가면: 지금쯤 8천만원 받고, 전세 살고, 체계적인 프로세스 안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의견이 반영되려면 몇 달 걸리고, 승진 경쟁하면서 눈치 보면서 일할 것이다. 스타트업을 가면: 지금처럼 5500만원 받고, 월세 살고, 자유롭게 의견 내지만 그게 항상 좋은 방향은 아니고, 연봉 걱정하면서 살 것이다. 둘 다 trade-off다. 문제는 나는 이미 스타트업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6년을 여기서 보냈다. 지금 대기업으로 이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능은 할까. 6년 차 스타트업 디자이너가 대기업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을까. 포트폴리오를 열어봤다. 마지막 업데이트가 1년 전이다. 정리해야 하는데 계속 미뤘다. 링크드인을 열었다. 대기업 채용 공고들이 보인다. "5년 이상 경력, 체계적인 디자인 시스템 경험." 우리 회사는 디자인 시스템이 없다. 만들자고 했는데 일정에 밀려서 못 만들었다. 이게 내 경력에 불리하게 작용할까. 새벽 2시까지 생각하다가 잤다. 월요일 아침 출근했다. 피곤했다. 슬랙을 열었다. 대표님 메시지가 떠 있었다. "디자님, 오늘 투자사 미팅 있어요. 프레젠테이션 디자인 부탁드려요." 또다. 지라를 열었다. 티켓이 17개다. 우선순위가 전부 '높음'이다.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개발팀 채널에 메시지가 올라왔다. "디자님이 만든 새 컴포넌트 너무 좋아요. 개발하기 편해졌어요👍"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수현이가 출근하면서 커피를 건넸다. "언니, 주말에 뭐 했어요?" "친구 만났어." "재밌었어요?" "응. 그럭저럭." 오전 미팅에서 대표님이 말했다. "이번 분기 목표는 MAU 50% 증가입니다. 디자인팀도 힘내주세요." 연봉 인상은 언제쯤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점심시간에 또 은지 생각이 났다. 8천만원. 2500만원 차이. 그런데 이상한 건, 아침에 받은 개발자 피드백이 계속 생각났다는 거다. "개발하기 편해졌어요." 내가 만든 게 누군가한테 도움이 됐다. 대기업에서도 이런 피드백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내 디자인이 수많은 결재 과정을 거치다가 흐지부지될까. 오후에 디자인하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디자이너가 됐을까. 돈 때문은 아니었다. 뭔가를 만드는 게 좋아서였다. 내가 만든 화면을 사람들이 쓰는 게 신기해서였다. 6년 전 선택은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단지 지금이 힘든 거다.결국 비교는 끝이 없다. 중요한 건 내가 지금 뭘 배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