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 Dec, 2025
컬러 코드 #000000은 너무 강해요, 라고 말했을 때 개발자의 표정
컬러 코드 #000000은 너무 강해요, 라고 말했을 때 개발자의 표정 어제 개발팀 핸드오프 미팅이었다. 새로 만든 디자인 시스템 컬러 토큰 설명하는 자리. 준비 많이 했다. 피그마에 토큰 정리도 깔끔하게 해놨고. "이번에 Primary Text는 #000000 대신 #1A1A1A로 갈게요." 민수씨가 물었다. "왜요? 검은색이면 000000 아닌가요?" 심호흡. "000000은... 너무 강해서요. 눈이 피곤하거든요." 그때 그 표정. 지금도 생각나면 웃긴다.검은색이 검은색이 아니라니 디자이너 아닌 사람한테 설명하기 제일 어려운 게 이거다. 순수한 검은색은 사실 잘 안 쓴다는 것. 자연에 순수한 검은색은 없다. 그림자도, 밤하늘도, 검은 머리카락도. 다 조금씩 컬러가 섞여있다. #000000을 쓰면 화면이 딱딱해 보인다. 특히 흰 배경 위에 올리면 대비가 너무 강해서 눈이 아프다. 그래서 살짝 밝게 조정한다. #1A1A1A, #2D2D2D, #333333 이런 식으로. 근데 이걸 말로 설명하면. "그게 그거 아닌가요?" 아니다. 전혀 그거가 아니다. 민수씨가 다시 물었다. "그럼 1A1A1A가 뭔데요?" "음... 약간 회색이 섞인 검은색이요." "그럼 회색이네요?" "아니요, 검은색이에요. 근데 좀 부드러운." 이 대화가 5분 계속됐다.개발자는 틀리지 않았다 사실 민수씨 말도 맞다. RGB 값으로 보면 #000000이 가장 검은색이다. 26, 26, 26이랑 0, 0, 0이랑 차이가 뭐냐고 물으면. 숫자로는 26의 차이다. 근데 눈으로 보면 다르다. 느낌이 다르다. 분위기가 다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민수씨, 이거 한번 봐보세요." 피그마 화면 공유했다. 좌우로 배경 두 개 놓고. 하나는 #FFFFFF에 #000000 텍스트. 하나는 #FFFFFF에 #1A1A1A 텍스트. "이거랑 이거 느낌이 다르지 않아요?" 민수씨가 한참 봤다. "음... 살짝?" "그렇죠! 살짝!" 승리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근데 이거 구현할 때 color-neutral-900 이렇게 변수로 쓰면 되는 거죠?" "네... 근데 한 가지만 더요. 다크모드에서는 이게 또 달라요." 민수씨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번역의 기술 지금은 좀 나아졌다. 디자이너 6년 차면 개발자 언어로 번역하는 법을 배운다. "이 컬러는 접근성 기준 AA를 만족해요." 이렇게 말하면 민수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숫자가 나오면 안심하는 것 같다. "000000은 명도 0%인데, 1A1A1A는 10%예요." 이것도 먹힌다. 퍼센트는 마법이다. "구글 머티리얼도 #212121을 쓰거든요." 이건 결정타다. 구글이 하면 다들 납득한다. 근데 가끔은 숫자로 설명 안 되는 게 있다. "이게 더 세련돼 보여요." "이게 브랜드 톤이랑 맞아요." "이게 그냥... 더 좋아요." 이럴 땐 그냥 솔직하게 말한다. "저를 믿어주세요. 제 전문 영역이에요." 다행히 우리 팀 개발자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같은 언어를 찾아가는 시간 작년에 신입 개발자가 들어왔다. 첫 협업 때 내가 말했다. "버튼 라운드를 8px에서 12px로 올릴게요." 그 친구가 바로 이해했다. "border-radius: 12px 이렇게요?" 감동했다. 요즘 개발자들은 디자인 용어를 안다. CSS를 알면 대화가 쉽다. 반대로 나도 배웠다. 개발 제약을 이해하는 것. "이 그라데이션 너무 예쁜데, 구현 어려우시면 단색으로 갈게요." "애니메이션 들어가면 성능 이슈 있죠? 줄일게요." "이거 컴포넌트로 만들어놓으면 재사용 쉬우시죠?" 이렇게 말하면 개발자들 표정이 밝아진다. 협업은 결국 번역이다. 내 언어를 상대 언어로. 감각을 논리로. 느낌을 숫자로. 완벽하게 번역되진 않는다. 뉘앙스가 사라진다. 하지만 그게 일이다. 여전히 어려운 순간들 그래도 가끔은 막막하다. 대표님이 "이거 좀 더 임팩트 있게" 하실 때. 임팩트를 수치화할 수 없다. 마케터가 "더 럭셔리한 느낌으로" 요청할 때. 럭셔리의 RGB 값은 없다. 기획자가 "감각적으로 해주세요" 할 때. 감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럴 땐 레퍼런스를 찾는다. "이런 느낌 말씀하시는 거죠?" 이미지로 보여주는 게 백 마디 말보다 낫다. 그리고 여러 버전을 만든다. A안, B안, C안. "어느 게 가장 임팩트 있어 보이세요?" 객관식으로 만들면 대화가 쉬워진다. #1A1A1A의 승리 그 미팅 이후로 3주 지났다. 어제 민수씨가 슬랙 DM 보냈다. "최디자님, 이번에 작업하면서 느낀 건데요." "1A1A1A가 진짜 더 부드럽네요." "다른 앱들도 보니까 다 순수한 검은색 안 쓰더라고요." 읽고 웃었다. 답장했다. "그쵸? ㅎㅎ 이제 보이시죠?" "다음엔 그림자 blur 값도 설명해드릴게요." 민수씨가 이모지 하나 보냈다. 😱 미안 민수씨. 디자인의 세계는 깊다. 하지만 고마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내 말을 들어주는 게. 그게 협업이니까. 그래서 오늘도 오늘 기획팀 미팅이 있다. 새로운 기능 UI 설명하는 자리. 준비는 다 했다. 피그마 프로토타입도 만들어놨고. 인터랙션도 넣어놨고. 분명히 누가 물어볼 것이다. "이 버튼 색깔은 왜 이래요?" 그럼 나는 심호흡하고 대답할 것이다. 숫자로, 레퍼런스로, 때로는 감각으로. 완벽하게 전달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어제보다 조금 더 가까워지면 된다. 서로의 언어를. 서로의 세계를. 그게 디자이너의 일이니까.#000000과 #1A1A1A의 차이를 이해시키는 데 5분, 신뢰를 쌓는 데 6년.
- 09 Dec, 2025
포트폴리오 업데이트는 언제 할 건가요? 라고 묻는 동기에게
동기의 질문 "포트폴리오 업데이트는 언제 할 건가요?" 카톡이 왔다. 동기 지영이다. 같이 입사했던 애. 지금은 다른 회사에 있다. 나는 답장을 안 했다.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서. "바빠서 못 했어" 치려다가 지웠다. 변명 같아서. "곧 할 거야" 치려다가 지웠다. 거짓말 같아서. 그냥 이모티콘 하나 보냈다. 웃는 얼굴. 지영이는 3개월 전에 이직했다. 연봉 2천 올렸다고 했다. 포트폴리오 정리하는 데 한 달 걸렸다고. 나는 2년째 안 만지고 있다.마지막 업데이트: 2022년 4월 포트폴리오 파일 이름이 "ChoiDesigner_Portfolio_2022_final_real_final.pdf"다. 열어봤다. 오랜만에. 프로젝트가 4개 있다. 전 회사 거 2개, 지금 회사 거 2개. 지금은 2024년 11월이다. 2년 반 동안 뭐 했나. 프로젝트는 7개 더 했다. 런칭한 것만. 디자인 시스템 만들었다. 컴포넌트 230개. 온보딩 플로우 개편했다. 가입률 23% 올렸다. 어드민 페이지 전체 리뉴얼했다. CS팀이 좋아했다. 근데 포트폴리오엔 없다. 왜냐면 정리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아니, 시간은 있었다. 주말에. 근데 주말엔 피그마를 보고 싶지 않았다.악순환 포트폴리오가 오래될수록 업데이트가 더 어렵다. 왜냐면 추가할 게 많아지니까. 많아지니까 부담스럽다. 부담스러우니까 미룬다. 미루니까 더 쌓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2년이 지나 있다. 지영이는 3개월마다 업데이트한다고 했다. 프로젝트 끝나면 바로 정리한다고. "그때 안 하면 나중엔 기억도 안 나더라." 맞는 말이다. 나는 6개월 전 프로젝트도 디테일이 가물가물하다. 왜 이렇게 디자인했는지, 어떤 의사결정이 있었는지. 슬랙 히스토리를 뒤져야 한다. 그것도 귀찮다. 그래서 또 미룬다. 현실은 회사에서 나는 바쁘다. 오늘도 미팅이 4개였다. 디자인 작업 시간은 3시간. 그 3시간도 온전히 집중한 건 아니다. 슬랙 메시지가 계속 왔다. "이 버튼 색상 좀 밝게 해주세요." "여기 여백 좀 줄여주세요." "이거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수정 가능할까요?" 수정하고, 버전 올리고, 핸드오프하고. 하루가 간다. 퇴근하면 7시 반이다. 집에 오면 8시 반. 씻고, 밥 먹고, 넷플릭스 켜면 10시. 포트폴리오 작업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 내일 9시 반 출근인데. 주말에 하자고 생각한다. 주말이 온다. 토요일 오전엔 밀린 잠을 잔다. 오후엔 남자친구 만난다. 저녁엔 친구들 만난다. 일요일엔 다음 주 준비를 한다. 빨래하고, 청소하고. 포트폴리오는 또 다음 주로.동기들은 지영이 말고도 물어본 애들이 있다. "요즘 뭐 해? 포폴 좀 보여줘." 보여줄 게 없다. 2년 전 파일을 보내기엔 민망하다. "요즘 너무 바빠서..." 라고 답한다. 사실이다. 근데 변명처럼 들린다. 동기들은 대부분 이직했다. 1~2년 주기로. 나만 6년째 같은 회사 아니면 2개 회사. 이직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연봉도 올리고 싶다. 근데 포트폴리오가 없으니까 지원을 못 한다. 지원을 못 하니까 이직을 못 한다. 이직을 못 하니까 연봉이 안 오른다. 또 악순환이다. 지영이는 말했다. "이직 생각 없어도 포폴은 계속 업데이트해야 해. 그게 곧 커리어 정리거든." 맞는 말이다. 또. 진짜 이유 사실 시간이 없어서만은 아니다.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서다. 포트폴리오는 나를 보여주는 거니까. 대충 만들 수 없다. 케이스 스터디 구조도 고민해야 한다. Problem - Solution - Result 순서로 갈까. Context - Process - Outcome이 나을까. 이미지 퀄리티도 신경 써야 한다. 목업은 어떤 걸 쓸까. 화면 캡처는 어느 시점 걸로 할까. 글은 또 어떻게 쓸까. 너무 길면 안 읽을 것 같고. 너무 짧으면 성의 없어 보이고. 생각만 하다가 시작을 못 한다. 시작을 못 하니까 완성을 못 한다. 지영이는 "일단 시작해. 완벽하지 않아도 돼" 라고 했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근데 나는 디자이너다. 디테일이 생명이다. 대충 만든 포트폴리오를 내보내는 건, 나를 부정하는 거 같다. 그래서 또 미룬다. 필요한 순간 지난주에 헤드헌터한테 연락이 왔다. "관심 있으시면 포트폴리오 좀 보내주세요." 회사가 괜찮았다. 직원 200명 규모. 시리즈 B 투자 받은 곳. 연봉 레인지도 좋았다. 7천에서 8천. "이번 주 안에 보내드릴게요" 라고 답했다. 그날 밤에 포트폴리오 파일을 열었다. 2022년 버전. 한숨이 나왔다. 프로젝트 7개를 추가해야 한다. 최소 일주일은 걸린다. 근데 헤드헌터는 이번 주 안에 달라고 했다. "죄송한데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실 수 있을까요?" "채용이 급하셔서요. 다음 주 월요일까지 가능하세요?" 결국 2년 전 버전을 보냈다. "최근 진행한 프로젝트는 조만간 추가하겠습니다" 라는 멘트와 함께. 답장이 안 왔다. 당연하다. 2년 전 포트폴리오를 보내는 디자이너를 누가 뽑겠나. 그때 알았다. 포트폴리오가 없으면 기회가 와도 잡을 수 없다는 걸. 변명들 "요즘 너무 바빠서." 맞다. 근데 모두가 바쁘다. 지영이도 바빴을 거다. "NDA 때문에 못 올려서." 일부는 맞다. 근데 전부는 아니다. 공개 가능한 프로젝트도 있다. "회사 일이 우선이니까." 맞다. 근데 내 커리어도 우선이다. "주말엔 쉬고 싶어서." 이건 진짜다. 근데 핑계다.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다. 포트폴리오를 진짜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시간을 냈을 거다.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안 옮긴 거다. 그게 2년이 됐다. 지영이의 말 "포폴이 없으면 내가 뭘 했는지 증명할 수 없어." 지영이가 했던 말이다. 카페에서. "회사에선 열심히 했잖아. 근데 그게 내 거로 남아있어? 회사만 성장하고 나는?" 찔렸다. 나는 2년 반 동안 프로젝트를 7개 했다. 회사 매출은 늘었다. 사용자는 늘었다. 회사는 성장했다. 근데 내 포트폴리오엔 아무것도 추가되지 않았다. 내 커리어는 그대로다.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건 2년 전까지의 일이다. "회사는 너의 포트폴리오를 안 만들어줘. 네가 해야 해." 맞는 말이다. 세 번째로. 오늘 밤 지영이한테 답장을 보냈다. "이번 달 안에 할게. 진짜로." "ㅋㅋㅋ 믿을게. 다 되면 나한테 보여줘. 피드백 줄게." 고맙다. 근데 부담스럽다. 이번 달은 11월이다. 남은 날이 열흘. 열흘 안에 포트폴리오를 업데이트할 수 있을까. 계산해봤다. 프로젝트 7개. 하나당 이틀이면 14일. 불가능. 그럼 핵심 프로젝트 3개만. 하나당 3일이면 9일. 가능할 수도. 주말 이틀, 평일 저녁 5일. 하루 3시간씩 투자하면. 21시간. 프로젝트 하나당 7시간. 빡빡하지만 불가능하진 않다. 일단 시작하자. 지영이 말처럼.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일단 80%만. 80%짜리 최신 포트폴리오가, 100%짜리 2년 전 포트폴리오보다 낫다. 내일부터 내일 퇴근하고 바로 시작할 거다. 넷플릭스는 꺼둔다. 핸드폰은 멀리 둔다. 프로젝트 하나를 고른다. 가장 임팩트 있었던 거. 온보딩 개편 프로젝트. 가입률 23% 올린 거. 슬랙 히스토리를 뒤진다. 기획 문서를 찾는다. 화면 캡처를 다시 한다. 목업을 만든다. 글을 쓴다. Problem부터. 하루에 조금씩. 월요일: Problem, Context 화요일: Process, Design decisions 수요일: Result, Metrics 목요일: 이미지 작업 금요일: 검토, 수정 주말에 나머지 두 프로젝트. 다음 주 월요일에 지영이한테 보낸다. 피드백 받고 수정한다. 그리고 헤드헌터한테 다시 보낸다. "업데이트된 버전입니다." 늦었지만 보내본다. 이번엔 진짜다.동기의 질문이 시작이었다. 이번엔 답을 만들어야 한다. 핑계가 아니라.
- 09 Dec, 2025
리드 수당 없이 3명을 이끄는 6년차의 금요일 밤
금요일 오후 6시 30분 슬랙에 메시지가 떴다. "최디자님, 내일 아침까지 이거 수정 가능할까요?" 가능하냐고? 불가능하진 않다. 팀원 둘에게 물어봤다. "금요일인데..." 답장이 왔다. 나도 알지. 리드니까 내가 한다. 리드 수당은 없지만.리드의 무게 올해로 6년차다. 우리 팀은 3명이다. 4년차 한 명, 2년차 한 명. 그리고 나. 회의에서 내가 말한다. 클라이언트 미팅에 내가 간다. 디자인 시스템 관리도 내가 한다. 월급명세서를 봤다. 4년차랑 70만원 차이. 리드 수당 항목은 없다.스타트업의 논리 작년에 대표님께 말했다. "리드 역할을 하고 있는데, 보상 체계를 논의하고 싶습니다." 대답은 이랬다. "우리 아직 스타트업이잖아요. 성장하면 당연히 드릴 거예요." 1년이 지났다. 시리즈 B 투자 유치했다. 직원은 40명이 됐다. 리드 수당은 여전히 없다. 개발팀 리드는 받는다. "개발자는 구하기 어려워서요." 그렇게 말했다. 금요일 밤 9시 사무실에 나 혼자 남았다. 개발자들도 다 갔다. 모니터 세 개를 켰다. 왼쪽엔 기존 디자인, 가운데 피그마, 오른쪽엔 레퍼런스. 컴포넌트를 수정한다. 버튼 스타일, 타이포, 컬러 토큰. 이거 바꾸면 다른 곳도 다 바뀐다. 그래서 더 신중해야 한다. 리드니까.책임의 범위 월요일 아침이면 팀원들이 물어본다. "이거 어떻게 하면 될까요?" "클라이언트가 이렇게 말했는데요." "개발팀에서 이게 어렵대요." 대답해줘야 한다.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때로는 대신 싸워줘야 한다. 기획팀이 무리한 요구를 하면. 개발팀이 일정을 앞당기자고 하면. 대표님이 "감각적으로" 라고 하면. 내가 막아준다. 내가 설득한다. 내가 타협점을 찾는다. 리드의 일이다. 근데 월급명세서엔 없다. 그 책임에 대한 돈이. 4년차의 질문 지난주 4년차가 물었다. "저도 리드 해보고 싶은데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솔직하게 말했다. "일 더 많아지고, 스트레스 더 받아요. 근데 돈은 그대로예요." 웃으면서 말했다. 진담인데 농담처럼. "그래도 경력엔 좋잖아요." 맞다. 이력서에 '디자인 팀 리드' 라고 쓴다. 다음 회사 면접에서 어필한다. 그게 내 보상이다. 대기업 동기 대학 동기가 있다. 대기업 디자이너다. 같이 밥 먹었다. 연봉 얘기가 나왔다. "7200 받아." "나 5500." 1700만원 차이. 월 140만원. "근데 넌 리드잖아. 리드 수당 받지?" "그런 거 없어." 동기가 놀랐다. 나도 놀랍다. 매번. 금요일 밤 11시 수정을 끝냈다. 슬랙에 메시지를 보냈다. "완료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읽음 표시가 떴다. "감사합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주말. 토요일 오전엔 개발자 남자친구 만난다. 그 친구도 야근했다. 어제. "야근 수당 나와?" "응, 1.5배." 부럽다. 리드의 가치 내 가치는 얼마일까. 팀원들 멘탈 관리. 클라이언트 대응. 디자인 퀄리티 책임. 시스템 유지보수. 개발팀과의 커뮤니케이션. 월 70만원 더. 연 840만원. 리드의 가치가 그 정도일까. 아니면 내가 호구인가. 이직의 유혹 헤드헌터에게 연락이 왔다. "6년차 리드 경력이면 7천 중반은 가능합니다." 2천만원 이상 차이. 월 180만원. 마음이 흔들렸다. 근데. 우리 팀원들. 내가 만든 디자인 시스템. 3년 동안 쌓은 것들. 그게 발목을 잡는다. 성장의 기로 스타트업에서 성장한다는 것. 돈으로 성장하는 게 아니다. 역할로 성장한다. 경험으로 성장한다. 그렇게 말한다. 모두가. 맞다. 근데 집세는 역할로 내는 게 아니다. 밥값도 경험으로 내는 게 아니다. 현실이다. 대표님과의 면담 다음 주 월요일. 대표님께 면담을 요청했다. 말할 것이다. 리드 역할에 대한 보상. 명확한 직급 체계. 성장 경로. 아니면. 이직 의사. 협상이다. 6년 동안 안 해봤던. 떨린다. 금요일 자정 퇴근했다. 지하철이 끊겼다. 택시를 탔다. 12,000원. 리드 수당이 있었다면. 야근 수당이 있었다면. 이런 계산 안 했을 텐데. 창밖을 봤다. 불 꺼진 사무실들. 다들 야근했을 것이다. 수당 없이. 나만은 아니다. 위로가 안 된다. 리드의 의미 집에 도착했다. 침대에 누웠다. 생각했다. 리드가 뭘까. 타이틀인가. 책임인가. 성장인가. 아니면 그냥. 돈 못 받는 중간 관리자인가. 내일 아침. 클라이언트가 확인할 것이다. 내가 야근해서 수정한 파일을. "감각적이네요."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게 내 보상이다. 선택 다음 주 면담에서. 두 가지 중 하나다. 리드에 합당한 대우. 아니면 이직. 6년 동안 참았다. 성장한다고 믿었다. 이제 선택할 때다. 내 가치를 내가 정할 때. 토요일 아침 알람이 울렸다. 오전 10시. 슬랙을 켰다. 습관적으로. "좋네요! 월요일에 발표하겠습니다." 읽고 껐다. 남자친구에게 문자했다. "점심 뭐 먹을까?" "네가 리드니까 네가 정해." 웃었다. 리드니까.리드 수당은 없어도, 리드의 고민은 계속된다. 월요일이 두렵고, 기대된다.
- 08 Dec, 2025
Pinterest에서 2시간을 보내다가 침대에 누운 후 '내일 할 일' 생각하며 잠드는 밤
영감인지 회피인지 퇴근하고 집에 왔다. 7시 반. 샤워하고 배달음식 시켰다. 8시. 이제 좀 쉬어야 하는데 자동으로 Pinterest를 켰다. "오늘만 30분만 볼게." 거짓말이다. 매일 이런다. 검색창에 'dashboard UI dark mode'를 쳤다. 핀 하나를 저장하면 알고리즘이 비슷한 걸 20개 더 보여준다. 저장, 스크롤, 저장, 스크롤. 손가락이 기계처럼 움직인다. 어느새 'minimalist portfolio design'을 검색하고 있다. 회사 프로젝트랑 관계없다. 그냥 예쁘다. 그냥 보고 싶다.시계를 봤다. 10시 반. 2시간이 사라졌다. 보드에는 핀이 347개 저장되어 있다. '프로젝트 레퍼런스' 폴더다. 이 중에 실제로 써먹은 건 5개도 안 된다. 나머지는 '언젠가'를 위한 수집이다. '언젠가'는 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래도 저장한다. 수집이라는 안전감 디자이너한테 레퍼런스는 마약이다. 회사에서 기획서를 받으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레퍼런스 찾기다. 백지에서 시작하는 건 무섭다. '비슷한 거' 있으면 일단 마음이 편하다. Pinterest, Dribbble, Behance, Mobbin. 탭을 10개 열어놓고 스크롤한다. "이 톤 괜찮네", "이 레이아웃 참고할까", "이 인터랙션 좋은데". 저장하고, 정리하고, 폴더를 만든다. 이 과정이 실제 디자인보다 더 오래 걸린다. 왜냐면 이건 '일하는 척'이기 때문이다. 레퍼런스를 모으는 동안은 실패하지 않는다. 아직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으니까. 평가받을 것도 없다. 안전하다.문제는 이게 중독이 된다는 거다. 저녁 9시, 내일 회의 자료 만들어야 하는데 레퍼런스를 또 찾는다. "하나만 더." 11시가 된다. 주말, 사이드 프로젝트 시작하려고 했는데 3시간 동안 핀만 저장한다. 정작 Figma는 안 켰다. 수집은 쉽다. 생산은 어렵다. 그래서 수집만 반복한다. 완벽한 레퍼런스는 없다 Pinterest를 2시간 보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세상의 모든 디자이너가 나보다 잘하는 것 같다. 핀마다 완벽하다. 여백 완벽, 컬러 완벽, 타이포 완벽. 내가 만드는 건 왜 이렇게 별로일까. 그런데 알고 있다. 저 핀들도 실제로는 다르다는 걸.클라이언트 피드백 30번 받아서 망가진 버전은 안 올라온다 개발 제약 때문에 타협한 결과는 안 보인다 실제 데이터 들어가면 깨지는 레이아웃은 숨겨져 있다Pinterest에 올라오는 건 '결과물'이 아니라 '포장'이다. 가장 예쁜 화면 하나만 캡처해서 올린다. 실제 서비스는 저것보다 못하다. 근데 새벽에 보면 이걸 잊는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하지." 자괴감만 쌓인다.레퍼런스는 도구다. 목적이 아니다. 근데 나는 종종 목적을 잊는다. '좋은 디자인'을 보는 게 목표가 된다. 정작 '내 디자인'은 안 한다. 이게 회피다. 진짜 일을 피하는 거다. 저장만 하고 안 쓰는 이유 폴더를 열어봤다. '대시보드 레퍼런스' 83개. 작년에 모았다. 프로젝트는 끝났다. 이 중에 5개 정도만 실제로 참고했다. '온보딩 플로우' 62개. 3개월 전 수집. 온보딩은 기획이 바뀌어서 엎어졌다. '컬러 팔레트' 124개. 이건 취미로 모은다. 쓸 일 없다. 저장할 때는 다 필요할 것 같다. "이거 나중에 써먹어야지." 근데 나중은 오지 않는다. 왜냐면 레퍼런스는 '상황'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멋진 대시보드 디자인을 찾았다. 근데 우리 서비스는 데이터가 20배 더 많다. 그 레이아웃은 안 맞는다. 감각적인 컬러 조합을 발견했다. 근데 우리는 기업용 B2B 서비스다. 저 톤은 너무 캐주얼하다. 레퍼런스는 '영감'이지 '답'이 아니다. 근데 수집할 때는 답처럼 느껴진다. 착각이다. 진짜 필요한 건 10개면 된다. 나머지 337개는 안심용이다. 내일 할 일이 머릿속을 채운다 침대에 누웠다. 11시. 내일 회의가 있다. 온보딩 플로우 개선안 발표. 준비는 70% 했다. 근데 마음이 불안하다. "스플래시 화면 애니메이션 디테일 좀 더 만들까." "튜토리얼 단계 4개가 맞나, 3개로 줄일까." "버튼 컬러 테스트 한 번 더 해볼까." 눈을 감았다. 근데 머릿속에서 Figma 화면이 떠오른다. 아트보드가 3개 있고, 컴포넌트가 정리 안 된 채로 있다. 폰을 다시 켰다. Pinterest를 열었다. 'onboarding UI'를 검색했다. 12시가 됐다. 이게 문제다. 영감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불안을 회피하는 거다. '더 좋은 레퍼런스'를 찾으면 내일 발표가 잘될 것 같은 착각. 안 그렇다. 지금 필요한 건 잠이다. 레퍼런스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규칙을 만들었다. 지키려고 노력 중이다. 1. 타이머 20분 레퍼런스 찾을 때 타이머를 켠다. 20분 후 알람. 그때 멈춘다. 더 찾고 싶어도 참는다. 완벽한 레퍼런스는 없다. 20분이면 충분하다. 2시간은 과하다. 2. 저장 개수 제한 10개 프로젝트당 레퍼런스 10개만 저장한다. 11번째부터는 기존 걸 지우고 저장한다. 진짜 좋은 것만 남긴다. 100개 모아봤자 안 본다. 3. 저장 후 바로 정리 핀 저장하면 바로 메모를 단다. "이 그리드 레이아웃 참고", "이 컬러 톤 테스트". 왜 저장했는지 안 쓰면 나중에 기억 안 난다. 쓸모없는 수집이 된다. 4. 주말에는 Pinterest 안 본다 주말은 영감이 아니라 휴식. 레퍼런스 보는 건 일이다. 일은 주중에만. 이거 지키기 제일 어렵다. 습관이 무섭다. 5. 수집보다 생산 레퍼런스 10분 봤으면, 디자인 30분은 한다. 비율을 정했다. 수집이 더 재밌다. 근데 생산해야 성장한다. 이걸 자꾸 상기시킨다. 영감은 도구다 Pinterest가 나쁜 건 아니다. Dribbble도, Behance도. 문제는 내가 거기에 중독된다는 거다. 수집이 목적이 되는 거다. 레퍼런스는 시작점이어야 한다. 도착점이 아니라.좋은 디자인을 보고 내 상황에 맞게 해석하고 실제로 만들어본다이 과정이 완성되어야 의미가 있다. 1단계에서 멈추면 소비일 뿐이다. 347개의 핀을 저장했다. 근데 내 포트폴리오에는 3개가 추가됐다. 이 비율이 문제다. 내일부터는 덜 모으고, 더 만들어야겠다.저장은 쉽고, 만드는 건 어렵다. 그래서 오늘도 핀을 모았다.
- 07 Dec, 2025
밤 11시, 드디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왔을 때의 쾌감
밤 11시의 마법 회사에서는 못 만든다. 저 디자인. 오늘도 회사에서 8시간 동안 피그마를 켰다. 아무것도 안 만들었다. 미팅 3개, 피드백 수정 7건, 슬랙 메시지 42개. 디자인한 시간은 실제로 1시간 반. 그러다 밤 11시가 되면 달라진다. 샤워하고 머리 말리다가 갑자기 오늘 못 풀었던 메인 화면 레이아웃이 떠올랐다. 맥북 켰다. 피그마 켰다. 시작했다.지금은 아무도 메시지 안 보낸다. 개발자도 잔다. 기획자도 잔다. 대표님은 당연히 잔다. 나만 깨어있다. 이때가 제일 좋다. 회사의 8시간 vs 집의 2시간 회사에서 8시간 동안 만든 것: 배너 3개, 버튼 컬러 수정 5번, 아이콘 정렬. 집에서 2시간 동안 만든 것: 완전히 새로운 온보딩 플로우 3개 화면, 인터랙션 프로토타입까지. 왜 이러는 걸까. 회사에선 시작하면 누가 부른다. "최디자님 잠깐만요." 집중하면 슬랙이 운다. "급한데요." 몰입하려는 순간 회의 알람. "5분 후 회의실 A." 집에선 아무도 안 부른다. 남자친구도 자기 방에서 코딩한다. 방해 안 한다. 우리 룰이다.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는 각자 몰입 시간.이 시간에는 시도할 수 있다. 회사에선 못 하는 시도. 기획서에 없는 레이아웃. 요구사항 밖의 인터랙션. 대표님이 싫어할 만한 색상. 실패해도 된다. 아무도 안 본다. Cmd+Z 누르면 된다. 다시 하면 된다. 회사의 디자인은 타협의 결과물이다. 기획 + 개발 가능성 + 일정 + 대표님 취향. 이것들의 교집합. 밤의 디자인은 순수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창의성은 여유에서 나온다 오전 10시. 메인 화면 디자인하라는 지라 티켓. "일단 레퍼런스부터 봐야지." Pinterest 켰다. 30분 지나갔다. "어 이거 괜찮네." 저장했다. 다시 30분. 기획자가 슬랙 보냈다. "저 확인 좀요." 기획서 읽었다. 요구사항 10개. 우선순위 없음. 전부 중요. "이거 화면에 다 넣으라고?" 물었다. "네 다 필요해요." 답왔다. 답답하다. 여백이 없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밤 11시. 똑같은 화면. 레퍼런스 안 본다. 머릿속에 이미 있다. 낮에 본 것들이 숙성됐다. "이렇게 하면 되겠다." 바로 시작한다. 프레임 만들고, 컴포넌트 배치하고, 타이포 조정하고. 손이 생각보다 빠르다. 막힘이 없다. 30분 만에 첫 시안 완성. 회사에서 3시간 걸릴 일. 차이가 뭘까. 여유다. 정신적 여유. 시간적 여유. "누가 볼까" 하는 불안 없는 여유. 창의성은 압박 속에서 안 나온다. 이건 회사가 모르는 진실. 경계에서 흐르는 영감 일과 삶의 경계. 나는 여기서 산다. 회사는 일이다. 돈 받고 하는 일. 요구사항 채우는 일. 스펙 맞추는 일. 집은 삶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실험하는 일. 실패해도 되는 일. 그런데 묘하다. 이 둘이 섞일 때 제일 좋은 게 나온다. 회사에서 못 푼 문제를 집에서 푼다. 집에서 시도한 방식을 회사에서 쓴다. 경계에서 순환한다. 지난주에 회사에서 못 만든 대시보드가 있었다. "데이터 너무 많아요. 어떻게 정리하죠?" 기획자한테 물었다. "그게 디자이너가 할 일 아닌가요?" 돌아왔다. 하... 짜증났다. 그날 퇴근했다. 밤에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카테고리를 접으면? 아니면 탭으로? 아니면 아예 단계별로?" 다음날 새벽 1시. 갑자기 일어나서 노션에 적었다. "위계를 3단계로 나눈다. 중요도 순서로 배치. 나머지는 모달로." 그게 답이었다. 월요일 아침에 만들었다. 1시간 만에 완성. 기획자가 "오 이거 완전 좋은데요?" 했다. 밤에 풀렸던 거다. 일에서 벗어났을 때. 왜 밤인가 낮에는 남의 시선이 있다. "이거 괜찮을까?" "대표님 싫어하실까?" "개발자가 어렵다고 할까?" "트렌디한가?" "촌스럽진 않나?" 이런 생각들이 손을 묶는다. 밤에는 나만 있다. "나는 이게 좋다." 이 기준만 있다. 순수해진다. 그리고 밤은 조용하다. 낮의 소음이 없다. 차 소리, 사람 소리, 알림 소리. 전부 사라진다. 머릿속도 조용해진다. 낮에 쌓인 잡음이 가라앉는다. "빨리빨리", "급해요", "내일까지". 이런 단어들이 증발한다. 고요 속에서 선명해진다. 내가 진짜 만들고 싶었던 것. 이게 밤의 마법이다. 하지만 대가가 있다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2시간. 이 시간이 내 진짜 창작 시간이다. 여기서 포트폴리오 나온다. 여기서 사이드 프로젝트 나온다. 여기서 내 디자인 나온다. 그런데 다음날 출근은 9시 반이다. 잠은 6시간. 부족하다. 매일 부족하다. "그냥 일찍 자면 되잖아." 남자친구가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근데 안 된다. 밤 11시는 협상 불가능하다. 이 시간을 포기하면 나는 회사 일만 하는 사람이 된다. 누군가의 요구사항만 채우는 사람. 내 디자인 없는 디자이너. 그건 못 참는다. 그래서 매일 피곤하다. 매일 부족하다. 그래도 만족한다. 어제 밤에 만든 온보딩 화면을 아침에 다시 봤다. 좋았다. 회사에서 절대 못 만들 디자인. "이거 사이드 프로젝트에 쓸래." 저장했다. 언젠가 포트폴리오 될 거다. 이게 내 자산이다. 회사 업무는 회사 것. 밤의 작업은 내 것. 11시가 기다려진다 요즘은 퇴근길이 설렌다. "오늘 밤에 뭐 만들지?" 생각한다. 어제 Pinterest에서 본 레이아웃을 내 방식으로 해석해볼까. 아니면 계속 미뤄뒀던 디자인 시스템을 정리할까. 아니면 그냥 새로운 앱 아이디어를 스케치해볼까. 가능성이 열려있다. 제약이 없다. 회사 일은 정해져 있다. 오늘 할 일, 이번 주 할 일, 이번 분기 할 일. 로드맵에 다 박혀있다. 밤의 작업은 자유다. 하고 싶은 거 하면 된다. 누가 뭐래도 상관없다. 이 차이가 크다. "디자이너로 살고 있나,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나." 요즘 드는 생각. 회사에서는 디자이너다. 직책. 역할. 연봉 5500받는 사람. 밤 11시에는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순수하게. 좋아서 하는 사람. 후자가 되고 싶어서 이 일 시작했다. 전자만 하다 보면 잊어버린다. 그래서 밤 11시가 필요하다. 지속 가능한가 솔직히 모르겠다. 6년째 이렇게 산다. 회사 일 8시간, 내 일 2시간. 매일 반복. 지치긴 한다. 30살 되니까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 새벽 1시에 자면 다음날 오전이 죽는다. "이러다 번아웃 온다." 친구가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안 하면 더 번아웃 올 것 같다. 내 디자인 안 하면 회사 일이 전부가 된다. "빨간색 더 빨갛게", "여기 2픽셀 내려주세요". 이것만 하다가 끝난다. 그건 더 무섭다. 차라리 피곤한 게 낫다. 피곤해도 만족스럽다. 어제 만든 거 보면 뿌듯하다. "내가 디자이너구나." 확인된다. 언젠가는 바뀔까. 회사 일이 내 일이 되는 날. 9 to 6 안에서 창의적일 수 있는 날. 그런 회사가 있을까. 있다면 가고 싶다. 근데 지금은 없다. 그래서 밤을 쓴다. 오늘도 11시 지금 11시 23분이다. 샤워했다. 머리 말렸다. 맥북 켰다. 피그마 켰다. 오늘은 회사에서 못 끝낸 아이콘 세트를 정리하려고 했다. 근데 방금 더 재밌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새로운 프로필 편집 화면을 만들면 어떨까." 회사 프로젝트랑 관계없다. 그냥 하고 싶다. 요즘 쓰는 앱들 프로필 화면이 다 비슷하다. 재미없다. 내 방식으로 하면 어떨까. 시작했다. 새 프레임. 320x700. 상단에 프로필 이미지. 아니다. 너무 뻔하다. 지웠다. 다시. 풀스크린 배경. 그라데이션. 그 위에 반투명 카드. 여기에 정보. 오. 괜찮다. 계속한다. 편집 버튼은 플로팅으로. 우하단. 아이콘은 펜슬. 색상은... #FF6B6B. 좀 강하다. #FF8E8E. 이게 낫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게 디자인이다. 내가 좋아하는 거.밤 11시는 내 시간이다. 회사 것 아니고 누구 것도 아니고. 여기서 나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그냥 디자인하는 사람이 된다. 그게 좋다.